중국 4대 미녀 중 마지막 네 번째 양귀비 이야기입니다.
양귀비는 그 미모에 꽃들도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는 뜻의 수화(羞花)로 표현되는 미인입니다.
양귀비는 아편의 원료가 되는 꽃 이름이기도 하거니와 우리나라에서는 머리 염색약 상표로 알려져 있지요.
양귀비의 본명은 양 옥환(鈺歡)입니다. 귀비는 황제의 후궁에게 주어지는 내명부 관직명이지요.
양귀비는 당시 세계 전체 GDP의 26%를 차지 할 만큼 강성하였던 당나라의 7대 황제 현종의 후궁이었습니다. 원래는 현종의 아들인 수왕(壽王)의 정실부인이었으나, 양귀비의 미모에 반한 현종이 며느리를 자신의 후궁으로 취하게 됩니다. 여름철 잠자리를 시원하게 하기 위하여 쓰던 죽부인도 부자간에는 공유하지 않던 우리 정서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지요. 이렇듯 중국에서 황제의 권위는 보편적인 인륜의 한계를 벗어나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선정을 펼치던 현종은 황후가 죽자 상심하여 술에 빠져 지내던 중 양귀비를 만나 위안을 얻었지만 그로 인하여 정사를 더욱 소홀히 하게 됩니다.
비록 후궁의 신분이었으나 양귀비는 황후를 능가하는 대우와 권력을 향유하였습니다. 현종은 양귀비를 ‘말하는 꽃’이라고 하며 지극히 총애하였고 양귀비는 그 총애를 이용하여 친정 식구들을 대거 관직에 등용하게 됩니다. 또한, 자기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었던 안록산을 양자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야사에는 구척 거구의 안록산이 연하의 양어머니 양귀비 앞에서 재롱을 떨고 응석을 부리기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유목민 돌궐족 출신의 안록산은 이미 사리분별의 통찰력이 사라진 현종의 신임을 받고 병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안록산은 재상의 자리에 있던 양귀비의 육촌오빠 양소와의 반목 끝에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양귀비는 현종과 함께 도주하다가 친위대가 배신하였고 강요에 의하여 현종은 양귀비를 명주실로 꼰 줄로 목을 매는 액형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나이가 39세이니 꽃 같은 미모가 시들기 전에 요절한 셈이지요.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지금의 서안)에 양귀비가 목욕을 하였다는 화청지라는 온천욕장이 있는데 몸에서 냄새가 심하게 났던 양귀비는 하루에 열 두번씩 목욕을 했었다고 전해집니다.
양귀비를 현대적인 미인관에 비추어보면 미인의 반열에 들기 어려운 조건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양귀비는 당시의 미녀 기준대로 키가 작고, 발도작고, 풍만한 체형에 가무의 재능까지 겸비하였던 요염하고도 총명한 여인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양귀비가 현대에 태어났더라면 자신의 용모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살을 뺀다느니 성형수술을 한다느니 분주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인 백거이(낙천)는 장한가(長恨歌)라는 장편 서사시를 통하여 양귀비의 출생에서부터 현종과의 로맨스 및 몰락의 과정을 표현한바 있습니다. 양귀비에 대한 문학작품이나 사료가 다른 미녀에 비하여 풍부한 편인데 문학이 융성하였던 당,송 시대를 살다간 미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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