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대미인 이야기 중 두 번째로 왕소군(王昭君)이야기입니다.
왕소군은 한나라 시절 양가집 딸로 태어났는데 이름은 장(嬙) 자는 소군(昭君)입니다. 빼어난 미모와 반듯한 심성의 소유자였던 왕소군은 한나라 황제였던 원제의 궁녀로 황궁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한나라 황궁에는 수천명에 달하는 궁녀들을 일일이 황제가 면접심사 할 수 없어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고 황제가 간택을 하였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이 화가는 뇌물을 주는 궁녀는 예쁘게 그려주고 뇌물을 주지 않는 궁녀는 추하게 그려주는 농간을 부렸는데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은 관계로 실물과 다르게 형편없는 추녀로 묘사되었습니다. 황제의 간택을 받지 못한 왕소군은 황궁의 한 구석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나라의 북방에는 흉노족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화친을 위하여 흉노족의 족장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가 한나라 황궁에 방문하였습니다. 호한야 선우는 양국의 우호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담보로 한나라 공주를 자신에게 출가시켜주도록 요청하였고 한 황제는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그러나 황궁 한 구석에서 빼어난 미모의 왕소군을 발견한 호한야는 왕소군이 황제의 승은을 입지 못한 궁녀임을 알아내고 다시금 황제에게 청하여 공주대신 궁녀중 하나를 선택하여도 되겠느냐고 요청하였고 자신의 딸을 먼 오랑캐 땅에 출가시키는 것을 우려하였던 황제는 호한야의 새로운 청을 기꺼이 수락하게 됩니다.
마침내 호한야와 혼례를 올리는 날, 기본 바탕이 미인인데다 한껏 멋을 낸 왕소군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자태였습니다. 뒤늦게 왕소군의 진가를 발견한 황제는 땅을 치며 아쉬워하였습니다. 내 어찌 저런 미인을 궁 안에 두고서도 이제서야 발견했더란 말인가? 그러나 이미 국가간의 약속을 해버린 뒤인지라 황제로서도 달리 어찌하지 못하고 왕소군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을 못이긴 황제는 왕소군의 초상화를 일부러 추하게 그려 올렸던 화가 모연수를 참형에 처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흉노 족장에게 시집을 가게 된 왕소군은 흉노지역으로 가는 먼 여정동안 두고 온 고향과 부모형제를 그리며 시름을 달래려고 말위에 앉은 채로 비파를 타는데 그 구슬픈 가락과 비파를 타는 왕소군의 자태가 너무도 고고하고 황홀하여 공중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기러기가 넋을 잃고 날개 짓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땅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소군의 별명이 낙안(落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군요.
흉노 땅에 도착한 왕소군은 호한야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고 호한야가 죽자 흉노의 관습에 따라 호한야의 정실부인의 아들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습니다. 왕소군의 아들은 후일 흉노의 족장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왕소군은 빼어난 미모로 인하여 국가간의 화친을 위한 볼모로 홀로 머나먼 땅으로 시집을 가게 되고 향수에 젖어 살아갔던 비운의 주인공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한 나라의 왕비가 되었고 왕은 살뜰히 왕소군을 아껴 주었으며, 자식까지도 왕위에 올랐으니 한 여인으로서의 삶이 행복하였는지 아닌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지요. 다른 미인들과는 달리 왕소군은 국가간 분쟁을 방지하고 화평을 유지하는데 미모를 활용한 케이스로 볼수 있습니다. 왕소군의 이야기는 설화적인 부분이 많으나 일부는 역사적인 사실로 확인되기도 합니다.
왕소군은 후에 진나라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와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고도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왕소군의 이야기는 훗날 많은 시, 산문, 희곡, 악곡 등의 소재가 되어 그녀의 인생역정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묘사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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