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0(목)
보고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혹시나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이규석 차장에게는 기대할 것이 별로 없었다.
약간의 통계와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Assessment Center에 관한 생각 이외에 그의 보고서에서 취할만한 것이 없었다.
많이 실망했다.
그리고 걱정스러웠다.
내가 만든 보고서를 놓고 보고를 받으며 보일 조원장의 차가운 조소를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이규석 차장의 보고서를 보고 느끼듯 조원장이 내 보고서를 보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같더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내가 생각하는 교육개혁안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자신감이 없으면 절대로 승리할 수 있다.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조금씩 자신감이 생긴다.
이제 마무리를 조금만 더 잘 해주면 무언가 작품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김승환 원장이 내 방에 들어와 머리가 아프다며 쇼파에 앉는다.
나는 그가 내 방에 그냥 쉬러 오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쉬러 오신게 아니고 내게 자문 받으러 오신 거다.
내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으시고 그 생각이 규정이나 노동법에 맞는지를 알아보고 싶으셨던 거다.
그의 말씀을 듣고 나서 나는 곧바로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설명해 드렸다.
인사규정을 임의로 해석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만들었고 내게 그 논리의 타당성을 인정받고 싶으셨던 거다.
솔직한 내 견해를 설명해 주다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의 감정이 갑자기 격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만일 원치 않는 사업소에 배치하여 일반직원 직무를 하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처장급 직무가 아니기 때문에 정당한 업무상 명령이 아니므로 이를 거부하겠단다.
다시 말하면 직무와 직급이 다르기에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만일 그렇게 하시면 해고를 당할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그것이 정당한 업무명령인지 아닌지는 추후에 법원에서 법적으로 따져봐야겠지만 어쨌거나 회사로서는 해고를 먼저 단행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그러면서 후배한테도 괴로움을 주고 회사한테도 상처를 주는 그런 일들은 안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드렸다.
김원장님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냉철한 내 분석에 많이 섭섭해 하셨을 듯하다.
이후에도 한참 동안 내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시더니 내가 별로 반응을 하지 않자 일어서 당신 사무실로 가셨다.
추상같던 그의 모습이 갑자기 추하게 느껴졌다.
실은 새로 부임한 김사장이 잘한 점도 있지만 잘못한 점이 너무 많다.
정년연장을 결정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정년연장과 동시에 직무에서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자신의 직급에 맞는 직무를 빼앗긴 사람들의 감정을 감성적으로 다독거려 주기는 커녕 오로지 성과만을 추구하며 몰아치려 했다.
때문에 보직을 잃은 정년퇴직 예정자들은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입었다.
김원장은 자신의 짧은 지식을 옹고집으로 버티며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까만 후배인 나를 은근히 떠보고자 하는 얕은 수법은 여전하시다.
일종의 자문인데 내가 너무 솔직한 답변을 드려 마음을 상하셨을 듯해 미안한 감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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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음악회에 갔다.
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는데 집사람이 강력히 원해 마지못해 갔다.
내 처지가 너무 힘들어 그런 곳에 가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음악에 문외한이고 특별히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처음엔 거절했었다.
하지만 집사람이 강력히 원하기에 이번에는 집사람 생각대로 따라주자는 마음으로 음악회를 찾았다.
원장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10분경에 나오느라 애를 태웠는데 빠듯하게 시간을 맞추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가기를 참 잘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고 듣는 것 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느낌을 받았다.
지휘자의 지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가 느끼는 감정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집사람도 좋아하는 것 같다.
공연장을 나오는 길에 인사처장을 만났다.
내가 그의 팔을 살며시 잡으며 인사를 했다.
그를 집사람에게도 소개시켜 주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사람은 그렇게 또 연결고리를 만드는 듯하다.
권태호에게 속아 나를 곤경에 빠뜨렸지만 결코 내게 사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태집에 들러 집사람과 저녁을 같이 먹으며 소주 한 병 마셨다.
정말 즐겁고 의미 있게 보낸 하루다.
집사람을 위한다고 한 것이 결국 나를 위한 일이 되었다.
삶은 그렇게 본인의 생각과 다른 가치와 의미로 가득 메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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