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가의 탄생에는 늘 그에 걸 맞는 배경들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의사였는데 지나치게 농노를 괴롭히다
그의 나이 18세 때 농노에게 맞아죽어 비명횡사했다.
그의 어머니도 17세 때 돌아가셨다.
페트라세프스키 사건(일종의 정치적 조작극)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 직전에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 사건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체험한 것이다.
그는 간질병까지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간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한 끝없는 욕구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도박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환상 속에 도박증으로 시달렸던 사람이기도 하다.
처칠은 ‘20대에 진보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 보수주의자가 아니면 뇌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런 환경들이 그를 극우 Chauvinist로 만들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죄와 벌은 심한 정신분열적 증상을 보이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강한 초인주의적 사상을 버리고 어떻게 아름다운 구원의 세계(소냐)로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은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를 짓밟는다.
그 안에서 인간은 극한의 생각과 행동을 배운다.
그래서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참뜻을 모른다고 했다.
돈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한다.
자유란 법률의 범위 안에서 누구나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본디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주변 환경으로부터 구속당하고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그는 ‘돈은 주조된 자유다’라고 주장한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법과 양심 따위의 경계선이
범인과 초인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본다.
법을 지키고 양심에 따라 살며 종족번식에 충실한 범인과
법과 양심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허용된 초월자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그래서 초월자에겐 신이 없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초월자가 되기도 한다.
나폴레옹이나 스탈린은 수십 수천만의 인간을 살해했지만 영웅으로 추대 받는 초월자이다.
그들이 그랬듯이 나도 초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온갖 이념적 논리로 무장한 정의를 위해 노파를 살해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이런 종류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수없이 존재한다.
이른바 법과 양심을 넘나들며 초인인체 행세하려는 졸부나 졸권들의 행태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들은 돈이나 권력을 행사하여 적선을 하기도 하지만
법과 양심의 경계선을 넘어 윤리적, 정치적, 종교적 매춘을 일삼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성스런 창녀 소냐의
아름다운 아가페적 사랑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오만한 초월주의에서 대지에 키스하며 겸손한 자연주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나는 왜 결론을 늘 이렇게 맺는지 모르겠다.
그거 보면 오만과 겸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생의 필연적 과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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