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다양한 서적을 통해 니체를 접했었다.
단편적인 말모음집을 포함해 니체 전기나 '짜라투스투라는 이헐게 말했다' 까지 다양하게 읽으면서 그의 생각에 깊이 공감해 왔다.
그의 생각과 내 생각이 많은 부분 일치하기 때문이다.
특히 관점론과 초인이론은 현재까지 나를 지배하는 중심 철학관이다.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세상 만물을 자신의 관념 안에서 인식할 뿐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올바른 관념체계를 가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올바른 관념체계는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며 학이시습하는 과정을 통해 죽을 때까지 자신만의 것을 다듬어 가는 것이다.
그사람의 실체는 그사람의 관념체계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관념의 통합으로 신도 만들고 국가도 만들며 시장도 만든다.
나아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 위버멘쉬도 만든다.
모든 개인은 자기만의 위버멘쉬가 존재한다.
그걸 기독교의 신이나 불교의 부처로 대신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초자아 위버멘쉬를 얼마나 아름답게 구성하는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나는 아직 신을 죽일만큼의 위버멘쉬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운명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부정되는 니힐리즘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위버멘쉬라는 걸 나는 안다.
어린아이 처럼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놀이의 도구로 삼고 경이와 즐거움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관념체계를 가져야 한다.
그게 바로 위버멘쉬라고 나는 정의한다.
니체가 살아있다면 아마 내 생각에 공감했을 거다.
하나의 신 아래 사는 인간이 아니고 각자의 신 위버멘쉬 아래 각자 사는 인간들이란 생각 말이다.
어쨌거나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어른이 버린 모든 것들을 매일 매일 새롭게 재창조하는 놀이를 통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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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니체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제대로 된 대안도 없이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는 건가?
사람들이 이렇게 비판하기 시작하면 니체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연히 인간이 기준이 되어야 하지만 기준이 되는 인간은 모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오직 자격이 있는 소수의 인간만이 진짜 진리가 무엇이고 도덕이 무엇인지 정할 수 있다고.
(귀족정신과 노예정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끌려가는 현시대 한국상황은 가장 저질의 노예정신이 지배하는 사회다.
그런 사회는 진화의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다수결의 힘으로 도덕을 만들어내고 그걸로 진짜 능력 있는 강자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걸 경멸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런 현상을 민주주의와 도덕 개념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보았다.
능력 없는 사람들이 모여 능력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려 하고 잘못된 기준을 정당화해서 사회를 지배하는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난 우월욕망의 충돌이 근저에 있다고 본다.)
그런 시대일수록 중요한 것이 있다
첫째 혼돈에 가득 찬 현실을 명확하게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그런 현실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와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저 편하게 다수결에 따른다든지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하지 말고 그 기준을 자기 스스로 치열하게 찾는 것이다.
즉 스스로 자기 자신의 신이 되어 살라는 것이다.
(이게 위버멘쉬다)
시지프신화에서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시지프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걸 고통이라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놀이처럼 인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형벌과도 같은 운명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영원회귀, 인생은 영원히 반복된다.
지루하다고 생각하면 지루하게 사는 거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하게 사는거다.
그러니 인생을 그냥 놀이로 생각하라.
매일 치는 테니스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그걸 중노동이라 생각하면 매일 뛰겠는가.
어린아이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다 놀이감으로 생각한다.
우린 그랬었다.
나이들고 머리가 커지면서 반복된 일상에 지루해하고 놀잇감을 잃어버렸다.
마치 테니스 놀이나 소꿉놀이처럼 영원히 반복하고 싶은, 그래도 좋은 삶을 살아라)
키르케고르는 대중이란 평등을 원해서 모든 것을 평균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질투는 수평화하는 관점이다.' 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평균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깎아내리기 좋아한다고 했다.
이러한 질투가 르상티망이다.
(이 르상티망 현상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걸 극복하지 않는 한 우리나라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사색당파 싸움도 그렇고 개딸 싸움도 모두 르상티망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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