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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3

20031217 K처장의 라떼이야기

by 굼벵이(조용욱) 2022.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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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2. 17()

저녁 6시쯤 되었을까 처장님이 나를 찾기에 가 보았더니 사장 앞으로 온 hot line email 편지 3통을 내놓으며 다면평가에 대하여 간단히 요약해 달란다.

사장이 hot line을 개설해 놓자 코딱지만한 불만이나 의견이 있어도 너도나도 사장에게 직보하는 모양이다.

사장에게 보내온 세 개의 편지 내용을 읽어 보니 모두 그렇고 그런 넋두리로 그리 쓸모가 없는 제언이었다.

그중의 하나는 새로 만든 다면평가 제도가 잘 되어있으니 승진에 그걸 활용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이를 놓칠 처장님이 아니다.

이를 빙자해 사장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설명자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걸 만들어 그의 방으로 갔더니 그는 그동안 승진심사 준비한다고 이야기에 굶주렸는지 엄청난 이야기 보따리를 쏟아냈다.

아마도 거의 한 시간 이상은 그 앞에 서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데 우선 K과 Y에게 승격 추천서를 써주지 않은 이유부터 설명했다.

그는 자회사 파견자들도 많은 데 그 사람들은 추천서를 써주지 않으면서 그들에게만 추천서를 써준다면 파견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했다고 사장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Y가 자기를 찾아와 자기라도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을 하길래 자기 쓰면 K는 어떻게 하며 K까지 쓰면 지역 안배가 안되고 그렇다고 T를 쓰면 K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추천을 할 수 있느냐고 일축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도 의견을 물어 와 나는 정직하게 그 사람들이 추천을 받을만한 사람들이 못 된다고 생각하기에 추천하지 않은 것 아니냐며 되받았다.

그리고 그는 K과 Y의 무능에 대하여 한참 동안 이야기하였다.

나는 그래도 내 새끼라고 K과장을 두둔했다.

무능한 그를 유능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무능해서 그렇지 마음은 그래도 쓸만하다고 슬쩍 말을 돌렸다.

그러자 그는 천만의 말씀이라며 무능하면 밤을 새우고 누구를 고아서라도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며 자기 자신이 과거에 처음 예산총괄부에 발령받았을 때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기 싫어 23일간 수안보에 쉬러 가는 것처럼 위장하고 밤낮으로 서류를 검토해 보고했다는 라떼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가 Y를 늘 제치고 L과장으로부터 직보를 받는 이유도 설명해 주었다.

Y는 무능한 데에다 늘 말썽을 일으켜 문제를 야기하고 도대체가 일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제치고 일을 하신 것은 정말 잘하신 일이라고 솔직하게 나의 의견을 말씀드렸다.

인사는 자기 사심을 버리고 공평하게 운영해야 하는데 그는 지나치게 욕심이 많아서 지난 기간 동안 자기 이익 중심의 인사를 해와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왔었다.

덕분에 우리가 그와 함께 일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남을 험담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를 위해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여 솔직한 나의 의견을 말씀드렸다.

그는 신이 나서 지금까지 사장실에서 사장과 나눈 이야기와 사장에게 결재를 받은 여러 가지 보고서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하나하나 서류를 직접 보여주었다.

어찌보면 그나 나나 불쌍한 사람들이다.

자기 스스로 세운 기준을 부하직원이 따라오지 못하면 모든 것을 직접 나서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자다.

쉽고 간단한 일도 어렵고 복잡하게 풀어가는 인간형들이다.

그는 보고서를 좀더 심플하게 써달라는 주문을 했다.

보고서 스타일도 귀납법보다는 결론부터 이야기하는 연역법 형식으로 바꾸라고 했다.

잔머리를 굴리지 못하고 눈치 없이 행동하는 나의 아둔함도 일깨워주었다.

그는 눈치 백단이다.

그걸로 초고속 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