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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3

20031215 용호상박에 등터지는 다람쥐

by 굼벵이(조용욱)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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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2. 15()

오늘은 무척 힘들었다.

아침에 기획처 A과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H부처장이 나를 좀 보자고 한다는 거다.

무언가 불안한 예감이 든다.

그동안 전문원 문제 때문에 OOOO팀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겪어 왔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나를 보자고 하니 필경 전문원 관련 사항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소문에 듣기로 H가 A랑 내년도 OO운영계획을 만들면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전문직 대상직무를 제 마음대로 만들어 24개의 직무를 전문원으로 운영하겠다고 사장 결재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직무분석을 포함해 전문원으로 운영하고 안 하고를 결정하는 직무관리 업무는 업무분장 상 우리처의 나에게 주어진 업무다.

직제규정상 업무분장에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사항을 월권하여 제 맘대로 사장 결재를 받았다는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아올라 그걸 참느라 곤욕을 치렀다.

작년에도 직급을 통합한다느니 하면서 M랑 A가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었다.

그 또한 업무분장상 엄연히 본부를 달리하는 내가 해야 할 일인데 오지랖 넓게 자기가 나서서 직급을 통합하겠다고 지랄 염병을 떨다가 결국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딛쳐 중단했었다.

나는 이 모든 잔머리와 잘못됨의 근원이 A에게서 나온 것을 안다.

그는 모사꾼 중의 모사꾼이다.

그는 법도 원칙도 없이 물불을 안 가리고 달려든다.

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멧돼지처럼 치닫는다.

그런 야수와 내가 함부로 맞붙어 싸우다간 진흙밭 개싸움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인사처장이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그 행태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정면으로 겨눈 화살에 그가 어떻게 대응할지 살피며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사장 앞에 쉽게 무릎을 꿇는 그이기에 고래고래 욕만 하다가 사장 핑계를 들어 꼬리를 내리고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면으로 맞붙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간단하다.

내가 관련 규정을 개정해주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인사처장과 기획처장이 맞붙어 싸우다가 사장의 중재로 정리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엄청난 리스크를 감당해야 한다.

그 와중에 내가 겪어야 할 고난의 시간도 엄청날 것이다.

그들이 왜 자기들 스스로 만든 규정까지 무시해가면서 그런 행동을 일삼는지 모르겠다.

한편으론 어차피 콩가루가 된 회사인데 법이고 원칙이고 지랄이고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자포자기가 앞서기도 한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견디고 극복해야 할 중대 사안이다.

만일 내가 이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 자리를 뜨는 게 옳다.

인사처장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야겠다.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나도 더 이상 못 견디겠으니 차라리 내 목을 치라고 해야겠다.

지방 오지로 유배를 보내던지 어디 허접한 교육이나 보내던지 하라고 해야겠다.

**********

 

잠시 머뭇거리며 주저주저하다 정공법이 최대의 무기라고 생각하고 H한테 내려갔다.

그는 그 특유의 거만을 있는대로 드러내며 나에게 바쁘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다.

제도는 이제 다 정리 된 것 같은데 뭐 하느라고 바쁘냐며 비아냥거린다.

사뭇 시비조고 핀잔조다.

그럴수록 깡패같은 직급에 눌려서는 안 된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태연한 척 실실 웃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사장지시라며 필리핀 2직급 직원을 1직급을 시켜야 하는데 자리가 없으니 그를 전문원으로 만들어 1직급을 시켜야겠다는 것이다.

현재 일반직에서 전문직으로 변경하는 것은 3직급 이하만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그걸 규정을 개정해 2직급도 전문원이 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기획처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인사처에서 해야할 일이다.

사장 지시사항에 대한 검토 자체가 인사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인데 기획처에서 쪼물딱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냥 알았다고 하고 순순히 자리를 물러 나왔다.

곧바로 처장에게 보고하니 두 시간 이내로 관련 보고서를 만들어 오란다.

그렇게 지시하고는 보고서를 가져가면 꼭 시계를 보고 얼마나 걸렸는지 확인하는 게 그의 못된 업무 스타일이다.

오후 2시쯤 해서 보고서를 만들어 가져가니 자기 스타일에 안 맞는다고 역정을 내면서 개발 소발 자기 스타일대로 수정해 준다.

그걸 다시 수정해 가져가려는데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승격심사위원 구성할 때 자기 직군 비율이 지난번에는 70%하려다가 다시 수정해서 60%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도 변함이 없느냐는 것이다.

거기서 내가 실수를 했다.

차라리 모른다고 했어야 옳다.

나는 곧이곧대로 그게 50%로 바뀌었다고 말해버렸다.

그러자 비서실장은 그 문서를 왜 자기에게 가져다주지 않았느냐며 빨리 가져오란다.

정식으로 사장님 사인이 난 문서가 아니고 사장님이 별도로 지시를 해 어쩌고저쩌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관련 문서들은 처장님이 가지고 있다고 횡설수설했더니 그 문서를 빨리 가져다 달란다.

처장과 비서실장이 기싸움을 하는 듯하다.

그 중심에 내가 있다는 생각에 앞이 콱 막혔다.

잠시 생각하며 고민을 하고 있는데 Y가 어디를 갔다가 털레털레 내게 오더니 승격심사위원회 구성 비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그제에서야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비서실장에게 가서 이러쿵저러쿵 고자질 한 것이다.

그는 그가 직접 처장님께 가서 보고를 드리겠단다.

나도 그와 함께 갔다.

그가 대충 관련 스토리를 이야기하자 처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처음부터 완전 오리발을 내민다.

그러면서 보고서가 급하니 나는 얼른 가서 보고서부터 작성하란다.

그 바람에 일단 면피는 했다.

만일 나 혼자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면 그는 내가 비밀을 누설했다며 산송장이 되었을 것이다.

보고서를 작성하여 가져다드렸더니 그는 일단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나중에 처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책임 전문원이 뭐냐고 물었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답변해주니 듣자마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무실로 찾아가 '보고서를 다시 만들어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그는 '됐다'고 하며 아무런 설명도 없이 '너는 왜 네 맘대로 하냐'며 신경질을 낸다.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무지하게 꼬인 하루였다.

A가 사장 결재가 났다며 전문원 관련사항을 가지고 왔다.

영 꼴 보기 싫어서 쳐다보지도 않고 Y부장에게 주고 가라고 하고 내 일만 계속했다.

천인공노할 짓을 해 놓았으니 그도 속이 편하진 않을 것이다.

퇴근하려는데 KY과장이 맥주 한 잔 하잔다.

KT과장과 KE이도 함께 동반해 그래스타워 지하에 위치한 조용한 찻집에서 맥주를 2병씩 마시고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