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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3

20031226 황제를 위하여

by 굼벵이(조용욱) 2022.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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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6

발전회사에 전적하지 않고 파견자로 떠도는 한계인(marginal man) 12명이 한전 사장을 상대로 강남지방노동사무소에 진정을 제기하였다.

본인 의사를 무시한 사외 파견행위는 불법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변호사를 선임해 진정서를 제출했다.

KM과장을 보내어 상황을 파악해보니 심각하게 꼬여가는 것 같다.

그런데도 K처장은 오로지 승진인사에만 정신이 팔려 이에 관한 내 보고서를 보려하지 않고 있다.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만 계속 이어지는지 모르겠다.

전에 H처장님 계실 때는 어렵고 힘들지만 나를 믿고 인정해 주어서 견딜만했는데 K처장은 너무 힘들다.

 

승진발표가 났다.

K를 비롯해 내 3년 또는 4년 후배들이 대거 승진했다.

내가 때를 잘못 만난 덕에 배가 아픈 것도 사실이다.

이번 인사는 신참을 우대해야 한다며 후배들을 대거 승진시켰다.

K처장이나 나나 정치가들 놀음에 장단 맞추며 함께 어우러질 수밖에 없다.

불쌍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K과장도 X부장도 모두 승진했다.

내 기준으로 보면 상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잘못된 영향력이 확장되기에 절대 승진시켜서는 안 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도 승승장구하며 잘도 승진한다.

승진을 포함해서 세상만사가 상당 부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직인다.

 

인사처 망년회를 한다고 모두 퇴근 후 간부식당에 모이란다.

가보니 식탁 위에 술과 안주용 보쌈 그리고 반찬들이 올려져 있고 전무님을 모셔다가 모두연설까지 하게 했다.

대형 케익을 자르는 등 유별난 각종 행사따위로 난리 통을 벌였다.

난 사실 그런 모습을 보면 우스꽝스러워 헛웃음만 나온다.

꼭 돈키호테가 로시난테를 타고 벌이는 기사 놀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설 중엔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그 행태와 꼭 맞아떨어진다.

시대는 2000년을 넘었는데 1970년대식 생각으로 벌이는 웃기는 행각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인사처 망년회 행사라는데 인사처 소속도 아닌 우리 회사 배구선수들까지 불러들였다.

그들도 어색해하는 것 같고 우리도 어색하다.

그것도 부족해 인사처 행사의 주인이면서 K처장은 L과장만 데리고 2차에 가서 배구선수들하고 술을 마셔댔다.

KT과장이 부산을 내려가야 했기에 그를 배려해주기 위해 그가 출발하는 버스 터미널 앞에 가서 한잔 더하고 가자고 했지만 KT과 KM과장은 노래방으로 나를 몰아세웠다.

KY과장도 KE이를 데리고 함께 왔다.

KM과장은 술이 어느정도 오르자 나에게 고맙다며 나를 헹가레 쳤다.

그가 능력에 부쳐 못한 일을 대신하느라 죽도록 고생한 대가다.

직속 상사인 내가 부하직원을 대신해서 혼자 일하기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노래방을 나서 집으로 가려는데 길거리에서 J씨를 만났다.

그는 굳이 같이 한 잔 더 해야 한다며 잡아끄는 바람에 파세디나에 가서 KY과장과 셋이 잭 다니엘 양주 작은 병 하나를 더 마셨다.

J씨가 술값을 내겠다고 우기길래 그럼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자고 제안하여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그가 이겼다.

덕분에 내 돈이 굳었다.

그의 부모는 이북에서 내려왔고 그는 서울에서 자랐다.

내가 경험한 서울 사람들은 시골 출신보다 성격이 정직하고 깔끔하다.

K처장이 그를 특별히 여긴 데에는 그런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북 난민들 특성대로 부모가 독하게 긁어모아 그는 5층짜리 건물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27일 토요일은 회사에 출근했다.

사장 진정사건에 대비하기 위하여 하루종일 인터넷을 검색하고 관련서적을 보며 연구에 몰입했다.

 

28일 일요일은 P처장이 테니스 회원들에게 승진 턱을 내는 날이다.

많은 회원들이 잠실 테니스장에 모여 함께 운동을 하고 맛고향집에 가 맥주와 해장국을 먹었다.

식후에 다시 두 게임을 더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맛고향집에서 해장국을 먹던 중 텔레비전에 긴급 속보가 떴다.

우리 사장이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회사를 장관으로 가기 위한 간이역으로 생각하는 행정관료 출신 정치인들이 많았는데 그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승승장구 영전하기 위해서 때론 양의 가죽도 써야 하고 사기에도 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