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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3

20031221 분기탱천 조져버린 크리스마스 이브

by 굼벵이(조용욱) 2022.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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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2. 21()

승격심사 실무반이 공릉동 연수원에 입소했다.

날씨도 춥고 특별한 약속도 없고 해서 이번 주말은 테니스를 하러 가지 않고 집에서 영화만 보았다.

노조에서 23일 노사협의회를 하자고 한다.

따라서 늦어도 22일은 K처장과 H전무에게 안건에 대한 검토의견을 보고하여야 한다.

K처장은 또 짜증을 내며 눈치 없는 노조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노조에 나도 화가 치민다.

1년에 한 번 있는 회사 최고의 관심사인 승진심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제 목적만 달성하기 위해 앞 뒤 없이 멧돼지처럼 달려든다.

처장님에게 승진심사 등 여러가지로 바쁘니 노사협의회 안건 검토서를 곧바로 전무님께 보고하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란다.

그의 지나친 완벽주의 때문에 무척 피곤하다.

잠시 후 처장님이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1직급 이동준비를 하란다.

그는 특유의 성격대로 내 일도 아닌 일을 또 내게 시키며 강하게 밀어붙인다.

1직급 인사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데 갑자기 내게 1직급 이동안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날 중에 말이다.

그래서 결국 밤 1230분까지 일을 해야 했다.

일을 끝내고 부지런히 삼성역으로 달려가 1240분에 도착하는 막차를 타고 퇴근하였다.

퇴근길에 K처장은 다음날 새벽 630분까지 출근할 것을 명하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잠자리에 누웠지만 걱정이 많았던지 중간에 자주 잠에서 깨었다.

선잠을 자고 출근한 23일은 아침부터 1직급 이동 안에 대한 보고가 이어지면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K처장은 내내 나의 보고서를 가지고 투덜거렸다.

글자가 작네, 칸이 안 맞네 하면서 계속 툴툴댄다.

그새 승진심사 실무업무를 위해 연수원에 가 있던 L과장 일행이 도착하여 서류 일체와 파일을 넘겨주었다.

오후에 L과장이 내게 와 승진심사 실무 내역 일체가 몽땅 사장실에 가 있는데 신입사원 3사람을 불러 사장이 직접 작업지시를 한다고 하면서 마음이 허탈하다고 했다.

기껏 힘들게 일해 열매가 맺자마자 달랑 열매만 따가는 결과라며 L과장이 많이 섭섭해 했다.

토사구팽 당하는 기분일 게다.

간부작업실에 들어가 농담삼아 개고기 맛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모두들 무슨 말인지 의아해 했다.

토사구팽의 개를 일컫는다고 한마디 부연했다.

내가 1직급 이동안을 힘들게 만들어 L과장에게 넘겨주는 것이나 그가 연수원에서 힘들게 일한 것을 신입사원에게 넘겨주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K처장이 요즘 내게 계속 짜증을 낸다.

내가 만든 보고서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가 요구하는 것을 제대로 충족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스타일, 문체, 언어 따위가 달라 맞춤형으로 충족시키기가 더욱 어렵다.

내 보고서가 어렵니 어쩌니 하면서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승진인사와 관련하여 주변 여론을 청취해 보고하란 지시를 내렸다.

신참을 우대해 주기 위한 승진년도 이행에 관한 보고서와 사업소장추천제 비율 강제 할당제 적용의 문제점도 보고서로 만들라는 거다.

신참 우대 관련 사항에 대한 검토는 나보다 직접 당사자인 Y과장이 검토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아 그를 불러 막 검토지시를 하고 있는데 K처장이 나타나 그걸 Y과장에게 검토하게 하라는 것이다.

확 기분이 잡쳤다.

그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는 항상 그런 식으로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

그러던 중에 사장에 대한 산자부 감사와 연계하여 사장 취임 후 제도개선 내역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라는 주문이 갑자기 들어왔다.

그걸 만드느라 또 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해야 했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매 20분마다 나타나 보고서를 독촉하며 일을 방해하는 거다.

보고서를 쉽게 쉽게 쓰라며 한 두 장으로 만들라고 했지만 그렇게 많은 주문을 쏟아내는 것을 어떻게 한 두 장으로 쉽게 요약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보고하고 싶은 엄청난 분량을 축약해 한 두장으로 압축하려니 축약된 단어와 문장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런 보고서를 보고 또 보고서가 어렵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자꾸 가슴이 메어온다.

이 사람에게 하릴없이 이용만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일이 아니라며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나 몰라라 그냥 까뒤집어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더하여 또 하나의 주문이 들어왔다.

지난 해 승진인사 때 감사실 K이를 추가 승진시키자 누군가가 투서를 넣어 이와 관련한 감사가 진행되었는데 나에게 그 정당성에 대한 논리를 만들어 내라는 것이다.

정말이지 화가 나서 미치고 팔짝 뛰겠다.

내가 동네북도 아니고 청소부도 아니지 않는가!

내 업무도 아닌 것을 그것도 대안 없이 욕만 얻어먹고 짜증나는 일들만 골라서 내게 맡기며 해결하라고 한다.

기껏 힘들게 만들어 가지고 가면 수고했다는 이야기보다는 짜증만 늘어놓으며 보고서 형식이 어떠니 어렵니 하면서 핀잔만 일삼으니 화가 나 미치고 돌아버리겠다.

결국 못 견디고 24일 저녁에는 크리스마스 이브인데도 Z에게 술을 한 잔 하자고 했다.

어차피 부산 집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T과장을 함께 불러 코가 비뚤어지게 마셨다.

부대찌게 집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너 댓 병 마시고는 카페에 가서 폭탄주를 마신 뒤 집으로 가려는 데 Z가 또다시 노래를 부르러 가잔다.

그는 원래 남 베껴 먹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 순진한 T과장이 제대로 바가지를 썼을 것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그날 먹은 술값이 돈 백만원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정말 몹쓸 사람이다.

다시는 그에게 술 먹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