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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3

20031001 북유럽 여행기

by 굼벵이(조용욱) 202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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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10. 1)]

잠이 오지 않아 복식호흡을 시도해 보았지만 잠깐씩 토끼잠만 들뿐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어 계속 뒤척이다가 아침 5시 반쯤 일어나 샤워를 하고 새날을 맞았다.

유럽의 호텔들은 미국의 호텔과 달라서 별이 다섯 개나 붙어 있는 호텔인데도 책상 위에 사용 안내판 하나 없다.

Morning call을 부탁할 수 없었고 무언가 문의 사항이 있어도 어떻게 front desk로 전화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당황했다.

그들은 데스크 위에 안내판을 별도로 설치하지 않고 대부분 하드 카버나 비닐 커버로 만들어진 안내 책자를 서랍 안에 비치하고 있는데 그 안에 여러 나라말로 필요한 안내 사항을 적어 놓고 있었다.

최부장님도 잠이 안 오는지 새벽 4시에 일어나 홀로 스톡홀름 시내 중심가를 방황하다가 여섯시가 넘어서야 나타났다.

다행히 호텔의 아침식사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breakfast가 제공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음식이 너무 짜 내가 해외여행 중 늘 먹던 대로 scrambled egg와 약간의 소시지 그리고 통감자를 가져다가 오렌지 쥬스와 함께 아침을 때웠다.

강광기 함안 분회위원장은 서양요리가 입에 영 맞지 않는다며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연수단장 김명수 처장님을 비롯해 일행 대부분이 크게 입맛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연수코스와 달리 좀 더 많은 것을 배워갈 생각으로 욕심을 내어 연수코스를 잡는 바람에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우리는 스웨덴 북쪽 해변가에 위치한 forsmark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에 가기 위하여 새벽부터 요란을 떨어야 했다.

아침 730분 이전에 출발해야 점심 무렵에 겨우 도착할 수 있다.

포스막으로 가기 위해 막 시내를 벗어날 무렵 길가 언덕에서 뛰노는 수많은 토끼와 토끼 굴을 보았다.

미국의 길가에 널려진 청설모 다람쥐들처럼 이곳엔 다람쥐 대신 토끼가 365일 굴을 파고 시내에 살고 있다고 한다.

김인자 가이더는 토끼가 교통질서를 가장 잘 지켜 절대 차에 치이어 죽는 일은 없다며 한마디 농담을 했다.

포스막으로 가는 길은 계속 이어지는 산골 숲길 그 자체였다.

노르웨이와는 달리 스웨덴은 평야가 많아 비교적 작은 산과 농장들이 길가에 계속 이어진다.

긴 버스 여행의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하여 현지 가이더는 스웨덴의 풍습이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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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들은 척박한 땅을 어렵게 개척한 사람들이기에 매우 근면하고 검소하다고 소개하면서 일례로 그들의 화장 문화를 들었다.

교회의 묘역은 계속 다른 사람들이 재사용 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 매장 후 납골당에 안치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후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대부분 화장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어 스웨덴 略史를 설명해 주었다.

스웨덴은 1200년부터 1500년 사이 봉건영주시대에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다.

봉건영주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이를 잠재울 목적으로 1520년경 덴마크는 82명의 스웨덴 영주를 초청해 왕의 이름으로 저녁만찬 연회를 연다고 속여 현재의 스톡홀름 구시가지에 있는 피의 광장으로 불러들여 가두고는 한 사람씩 목을 쳐 그 피가 광장 가득 흘러내렸다고 한다.

그곳을 피의광장이라고 명명하고 지금까지도 유명한 관광 명소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이 내린 영주였던 구스타파 바사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참형이 시작될 무렵 북쪽의 춥고 척박한 땅 덜라나로 도망을 가 3년간 숨어 살다가 1523623일 덜라나 지역 농민을 규합하여 봉기를 일으켜 덴마크 군대를 몰아내고 스톡홀름을 되찾아 처음 스웨덴에 통일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그 통일왕조가 바로 그 유명한 바이킹족이다.

그들은 전쟁에 매우 능했는데 1600년부터 1800년까지 수많은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서도 문화재의 손실이 적은 이유는 선제공격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란다.

다른 나라가 쳐들어 올 기미가 보이면 먼저 쳐들어갔기에 자신들의 영토가 짓밟히는 일이 없었다는 거다.

그러나 싸움꾼인 그들도 결국 러시아와의 무모한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고 오랜 전쟁에 시달리던 영주들은 이를 계기로 왕위를 축출하고 나폴레옹의 오른팔이었던 베나덧장군을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1815년 대관식을 가짐)

베나덧 장군은 프랑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스웨덴 왕가의 시조를 이룬 용맹스런 장군으로 나폴레옹에게 버림받은 약혼녀 베지레와 결혼하여 왕가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베지레는 프랑스에 비하여 날씨가 춥고 척박한 스웨덴에 살기를 꺼려 주로 파리에 살았지만 나폴레옹과 베나덧과의 전쟁을 중간에서 중재하여 막기까지 한 희대의 여걸 로비스트였다고 한다.

1815년에 스웨덴은 노르웨이를 합병하고 지금까지 200년간 전쟁 없이 계속 평화를 구가해 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히틀러에게 핀란드로 통하는 길을 터주기로 하고 전쟁을 모면하여 다른 나라가 전쟁에 시달릴 때 산업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었다.

스웨덴은 철강산업이 발달하였는데 특히 세계대전 후 무기 시장을 중심으로 철강산업이 호황을 누려 오늘날의 부를 축적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노동인구가 부족하여 남유럽의 이주민을 많이 받아들였지만 그들만으로는 부족하여 여성들을 산업 현장에 투입했다.

따라서 산업 현장에 나간 여성을 대신해 국가가 아이들을 돌보는 육아 정책(세 살부터 탁아소에 맡기어져 국가가 아이들을 양육)이 잘 발달 되어있다.

1990년대에 찾아온 불황 때에도 경제가 무척 어려웠지만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살 수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닫고 노사가 서로 손을 잡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 헤쳐 나갔다고 했다.

이인자 가이더는 그런 면에서 프로였다.

우리가 노사합동 연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노사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멘트까지 곁들여 연수의 목적과 의미를 되새긴 것이다.

복지국가의 대표로 알려진 나라답게 그들은 우리와 다른 세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북쪽의 척박한 땅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남쪽의 잘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데 이를 로빈훗 Tax’라고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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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막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에서는 홍보담당 직원이 OHP를 이용하여 현황을 설명한 뒤 처분장 현장까지 안내해 주었다.

처분장은 환경부에서 직접 관리하며 국내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중저준위 폐기물을 저장한다.

관리 직원은 10 ~ 15명이 상주한다.

2020년까지 사용할 계획인데 향후 더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폐기처분 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어찌 되었는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해변가 육지에서 지하로 바다 쪽으로 파 내려가 바다 밑 지하 50M 정도에 처분장을 만들어 준위별로 저장하고 있다.

사회민주당을 비롯하여 환경 관련 단체에서 원자력발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석유나 가스가 없는 스웨덴의 입장에서는 원자력을 대체할만한 에너지가 없어 국민 여론도 이를 수용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한다.

방폐장 운영비용은 원자력 원가의 1%를 방사성폐기물 처분 비용으로 거두어 활용하며 이중 1/10이 폐기장 비용으로 쓰인다고 한다.

본 폐기장은 1983년에 건립되었는데 워낙 외진 시골이어서 주민들이 별로 많이 살지 않았으므로 건립 당시 주민들의 저항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점심 식사는 그곳 구내식당에서 안내 담당 직원과 함께 하기로 했다.

훌훌 날아다니는 쌀밥에 크림 비슷한 것을 얹어 비벼 먹는 것이었는데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방폐장 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육도시 웁살라를 들렀다.

웁살라는 대성당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 인구가 15만 명 정도 하는 작은 학교도시다.

웁살라 대학 한 편에 대성당이 위치하고 있다.

그 성당 자리가 바로 성 에릭주교가 목이 잘린 자리라고 하며 그가 목이 잘릴 때 파란 하늘에 금 십자가가 뜨는 걸 보았다고 해 이후 금 십자가를 스웨덴 깃발로 정했다고 한다.

이 성당 건립 공사는 1260년에 시작하여 1435년에 완공한 것으로 무려 175년 동안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들의 대를 잇는 끈질긴 役事를 보면서 그들의 장인정신이 무척 부러웠다.

왕들의 대관식 때 이 성당을 주로 이용해 왔는데 완공 후 불에 타 다시 증축하였다고 한다.

웁살라 대학 도서관 현판에는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은 더 위대한 것이다

는 문구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내가 평소에 늘 마음에 품어온 좌우명 중의 하나여서 나의 옷깃을 다시 한번 여미게 했다.

스웨덴이 나은 19명의 노벨리스트 중 7명이 웁살라 대학 출신이라고 하니 그 명성을 이해할 만했다.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학생으로 출발했는데 지금은 3만여 명에 이르며 1600년도에 구스타프 아돌프’ 2세가 이 대학을 활성화 시켰다고 한다.

교회 위엔 웁살라 성이 위치하고 있는데 스웨덴 사람들도 나름 풍수지리를 믿었는지 교회보다는 왕권이 높아야 한다고 교회보다 높은 언덕에 성을 지었다. (1540)

1800년대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지금은 도지사가 거기 살고 있다.

웁살라 대학에서 파티가 열릴 때 파티 장소로 제공해 주기도 한다.

웁살라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일부러 지방도로를 이용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목장과 수목들이 펼치는 북유럽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보여주기 위한 이인자 가이더의 작은 배려였다.

저녁식사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가이더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지만 며칠 전까지 한국에서 김치찌개로 매 끼니를 이어온 우리에겐 별 맛없는 찌개인데 무얼 그리 호들갑을 떨며 자랑을 해 대는지, 여자들이란...

우리는 노사 간 초면이어서 서로 이름과 얼굴을 몰라 서먹서먹한 상태였으므로 호텔 식당을 빌려 상견례를 갖기로 하였다.

네덜란드 공항 면세점에서 사온 양주와 한국에서 등짐으로 들고 온 팩 소주, 깻잎, , 멸치 따위를 끄집어내어 식당 종업원 아가씨가 준비해 준 촛불을 켜 놓고 파티를 열었다.

운치 있고 그럴듯했다.

나는 그날 몸도 피곤한데 이 사람 저 사람을 돌며 모두에게 술을 권하고 마신 술이 도를 지나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오은진 처장님 방에 간 것까지는 잠깐 기억나는데 다음부터 블랙아웃 되어 버렸다.

아마도 가자마자 졸기 시작했고 졸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문총무가 내 방에 데려다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