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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3

20031003 북유럽 여행기

by 굼벵이(조용욱) 202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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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날(10. 3)]

깊은 잠을 못 자고 새벽 3시부터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5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최부장님과 함께 새벽 조깅을 나갔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인적 없는 오슬로 시내 거리를 30여 분 달리니 선창가가 나왔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 시간에도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보이련만 정말이지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찰을 도는 경찰차였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호기심에 사우나를 찾았다.

그러나 사우나 키(key)가 작동하지 않아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키를 다시 받아 문을 열게 하였다.

이 과정을 조용히 지켜본 최부장님은 영어실력이 유창하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사실 생활영어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지레 겁을 먹고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리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외국인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장익상씨나 허충범 위원장의 참여자세는 매우 칭찬할만하다.

사우나에 우리 말고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버스에 올라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오늘 아침 사우나를 갔는데 서양 여자들은 거봉입디다.” 하니

내가 풍기는 뉘앙스가 워낙 정직해서 모두 진짜로 알아듣고 사우나에 안 간 것을 무척 후회하는 눈치였다.

아침 안개와 비가 계속 오락가락하는 날씨여서 홀맨 콜렌스키 스키점프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곧바로 지구가 낳은 최고의 거장 중의 하나라는 비겔란트의 조각품을 감상하러 갔다.

노르웨이가 낳은 거장이 3명 있는데 하나는 ‘scream’의 작가 뭉크이고 다른 하나는 인형의 집을 저술한 여성해방 운동가 입센그리고 조각가 비겔란트라고 한다.

그의 조각품들은 8만 에이커에 달하는 공원 안에 212개의 조각과 671개의 인물상으로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인생의 희노애락을 다룬 것으로 공원의 모든 설계까지도 비겔란트가 직접 하였다고 한다.

그는 오슬로시에 그의 조각을 전시할 수 있는 아뜨리에를 만들어주고 생계비를 대주면 평생 동안 자기가 조각한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제안했는데 오슬로시가 돈이 없어 머뭇거리자 스웨덴에서 그를 데려가려 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성금을 내어 현재의 조각공원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서기 800년대의 바이킹 배 박물관을 구경하였다.

날씨도 추운데에다 높은 산악지대여서 경작지가 부족하지만 추운지방에서 힘겹게 자란 고밀도 참나무가 무성해 그들은 그 참나무를 베어다가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시절 그곳에서의 해적질은 경제활동의 주된 수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적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술에다가 독버섯을 섞어 마시면서까지 독하게 싸워가며 노략질을 해야 먹고살 수 있었던 거다.

그러므로 바이킹은 결국 자연적 환경의 산물이지 민족적 기질은 아니다.

 

1000여 년 전의 남의 나라 보잘것없는 썩은 배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오늘날 세계사의 주인공이 된 유럽인들에게는 바이킹이 갖는 의미가 남다를 것이다.

그들은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매장문화가 발달했는데 바이킹이 죽으면 배와 함께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가끔 바이킹 배를 발굴할 때 젊은 처자의 유골도 함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서 처나 첩 또는 노예를 산채로 순장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르웨이하면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관광 명소 피요르드를 구경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산길을 달려야 했다.

호수와 폭포 그리고 양치기 농가가 계속 이어지는 산골을 굽이굽이 돌아 라르달로 향했다.

목적지인 Lindstroem 호텔로 가는 길에 산악 마을에서 서기 800년에 지었다는 새까맣고 예쁜 목조 교회를 볼 수 있었다.

그 목조건물은 적송으로 지어졌다는데 적송은 송진 때문에 벌레나 부식을 방지할 수 있어 장기간 보존이 가능했다고 한다.

Lindstroem 호텔은 200여 년 전에 지어진 건물로 산꼭대기 분지 라르달 마을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로 돼지고기 찜이 나왔는데 먹을만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그곳을 찾았으면 이 호텔 바에서 피아노를 치는 원주민 아저씨가 한국노래를 연주해주며 마이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까지 하였다.

가이더를 비롯하여 일행 몇몇이 노래를 불렀지만 나는 노래도 잘못하는 데다가 몸이 몹시 피곤하여 그냥 방으로 올라왔다.

벌거벗고 욕조에 들어가 가져온 빨래비누로 그동안 갈아입은 속옷 세 벌과 양말 세 켤레를 열심히 빨고 있는데 장익상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서 가져온 팩소주를 자기 방에서 함께 마시자는 거였다.

빨래를 대충 정리하여 널고 장익상씨 방으로 가니 도정만 위원장과 김훈민 위원장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깻잎을 안주 삼아 나도 함께 어울려 몇 잔 마시고 나니 취기가 돌아 적당히 정리하고 돌아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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