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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사랑하는 아들아

호신이와 명란젓

by 굼벵이(조용욱) 2009.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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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이와 아침을 먹는 시간은 호신이에게나 나에게나 모두 고통스런 일이다.

호신이는 지금껏 한번도 제 어멈이 밥 먹으라고 부르는 첫 번째 소리에 반응한 적이 없다.

“호신아, 밥 먹어라”

처음에는 엄마가 부드럽게 부르다가 대 여섯 번 불러도 잠자리에서 안나오면 짜증 강도가 높이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목소리가 날카로워 진다. 나는 가급적 우리집에서 부정적인 표현을 쓰지 말자고 했지만(사실 이 표현도 부정적인 표현으로 모순이다) 참다못한 엄마는 나중에

“너 안 일어 날거야?”하고 고함을 지른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과정이 철저하게 행동학습 되어 몇 번째, 어떤 상태의 부름에 반응할 것인지가 인지도식으로 짜여져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일정 한계를 넘은 고함이 있었는데도 안 일어났다. 그 과정을 계속 지켜보는 나도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요즈음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일어나 밥 먹어라!”

하고 점잖은 어조로 녀석을 불렀다.

녀석은 제 아버지가 한 성깔 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제 어멈 말은 개떡같이 알아도 아버지 말은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

잠에서 덜 깬 상태로 인상을 완전히 구긴 채 밥을 먹는데 정말 가관이다. 지인이 보내준 명란젓을 제 어멈이 반찬으로 내어놓았는데 한 입 반찬 하기에는 조금 크게 잘라놓았다. 녀석은 그걸 젓가락으로 자른다고 명란젓 덩어리와 씨름을 하는데 잘 안 잘라지니까 극도의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면서 젓가락을 휘저어 크게 털어낸다. 한 쪽을 젓가락 끝으로 잡고 털어서 자르려는 시도를 반복하는 과정을 바라보면 그의 짜증이 극에 달해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 같았으면 한소리 했으련만 오늘은 꾹 참고 녀석의 행태를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가슴 속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명란젓 함부로 대하지 마라.

그 명태를 잡기 위해 흘렸을 어부의 땀방울과

젓을 따는 아주머니의 잔주름

고추 모종을 심고 몇 달을 키워서 땡볕에 나가 따고 말리는 농부의 시름

그 고추를 가루로 만드는 방앗간 할머니의 흰 머리

고춧가루와 명란으로 젓갈을 만드는 공장 아주머니의 아픔이

골고루 배어있는 명란젓을

제 어멈의 밥 먹으란 말조차 듣지 않는

너 같은 녀석의 학대를 받아야 할 젓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말들을 그냥 마음으로만 품었다.

왜냐하면 호신이 가슴에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나는 호신이가 자기 자신 만의 작은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세상 만물의 고귀함을 스스로 깨닫는 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