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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상처받지 않을 권리(강신주)

by 굼벵이(조용욱) 2014.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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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의 생존 비밀은 바로 욕망의 집어등이란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듯합니다.

화려한 등불의 불빛은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도달하고 싶은 치명적인 유혹을 안고 있으니까요.

집어등의 유혹, 타오르는 욕망, 자유로운 소비, 허무한 결핍, 인내로 가득찬 노동,

다시 시작되는 집어등의 유혹......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은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그는 우리 욕망의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이라기 보다는 타자의 욕망이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던 것입니다.

(나는 타자의 욕망이라기보다는 타자에 의해 내면화된

자신의 페르조나의 욕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고 본다.)

 

화폐경제의 등장은 인간과 사물 사이 혹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항상 돈이 개입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과 사물 사이에 돈이 개입되자 이제 사물들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합니다.

짐멜은 ‘화폐경제는 개인과 소유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매개된 관계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이들 둘 사이의 거리가 생기도록 만든다.’고 했습니다.

짐멜은 개인주의가 개인과 개인이 돈으로 매개되는 화폐경제에서만 출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돈이 없으면 우리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신기루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짐멜에 따르면 기독교의 신이 가진 초월성과 포괄성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바로 자본주의 하에서 생겨난 돈입니다.

돈을 사용해버리는 순간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마치 신이 떠난 것처럼...

돈과의 관계에 집중하면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 소홀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사랑마저도 왜곡할 힘을 가졌습니다.

사실 우리는 돈을 위해 사랑하고, 돈을 위해 신뢰하고, 돈을 위해 우정을 맺는 것은 아닐까요?

모든 타자가 내가 가진 화폐를 욕망한다고 맹목적으로 믿기 때문에 나는 화폐를 욕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의 기원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상에게 돈이란 인공 날개였던 셈이지요.

인간들은 노동을 통해 인공 날개를 마련합니다.

 

인간은 차이를 본질로 하는 존재입니다.

즉 그의 의식은 그 때 그 때의 인상이 선행하는 인상과 구분되는 차이에 의해 촉발됩니다.

대도시인들은 급변하는 외부환경에 심장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됩니다.

반면 시골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공동체에서 익힌 습관과 경험을 제2의 천성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시골사람들은 주변세계와 유기적인 일체를 구성하며 삶을 영위한다면

지적인 도시인은 주변세계와 얼마간 거리를 두고 살게 됩니다.

도시인이 시골이란 공간 속에서 느끼는 답답함의 이면에는

도시 공간이 만들어준 자유감정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시골보다 도시에서 자유롭게 느낄까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속내 감추기로 인한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런 도시인의 냉담한 태도 즉 이로부터 발생하는 자유로움의 감정은

사람들을 원치 않는 고독에 빠지게도 합니다.

냉담한 태도를 지속하다보면 자신의 속내를 공감할 사람이 주변에서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대도시는 자유라는 달콤함과 함께 고독이라는 씁쓸함을 동시에 가져다 준 것이지요.

그 고독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자유를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합니다.

짐멜은 “자유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특수성과 비교 불가능성이

삶을 살아가는데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지요.

 

매춘부이기 때문에 파리라는 화려한 도시는 보들레르에게 일종의 악의 꽃이기도 합니다.

이 꽃은 순수하고 서정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돈을 대가로 치러야만 화려하게 피어나는 존재입니다.

산업자본은 필요 이상으로 상품들을 사들일 만큼 소비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만 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새로운 상품’을 계속해서 시장에 내 놓는 것입니다.

새로운 상품이 아케이드에 들어오면 기존상품들은 낡은 상품이 되어버리고

결국 아케이드에서 추방되고 말지요.

바로 여기서 유행이 가능해졌습니다.

인류가 새로운 것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미 존재하고 있던 현실이라는 것이 폭로됩니다.

나아가 이 새로운 것도 새로운 유행이 사회를 쇄신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에게 해방적 해결책을 줄 수 없습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억압받는 사람에게 역사는 전혀 진보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억압하는 자들만 진보를 주장해 왔습니다.

이에 부응하는 것이 다름 아닌 패션입니다.

최신 상품을 살만큼 부유하고 그래서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고 보여줍니다.

상류계급이 중류계급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 지으려는 노력이 바로 패션입니다.

중간계급이 새로 등장한 패션을 받아들이자마자 상류계급에게서는 이미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주장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기보다는 탐욕스럽고 잔인할뿐더러

질투심으로 가득 찬 허영의 존재에 더 가깝습니다.

예링에 따르면 인간은 합리적이기는 커녕 변화욕, 미적 감각, 겉치레를 좋아하는

모방본능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입니다.

 

패션은 첫째 상류사회로부터 기원합니다.

둘째 중간계급이 상류사회의 패션을 모방하자마자 곧바로 소멸합니다.

셋째 패션은 중간계급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폭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드러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링이 패션의 소멸을 꿈꾸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중간계급이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존엄에 눈을 뜨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나 꿈꾸지만 인간의 내면에 깊숙히 뿌리박힌 집단무의식을 넘어서지 못하죠.

중간계급이 폭 넓게 형성되어야 하고 올바른 의식을 가져여 함을 단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패션은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계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둘째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생존하는 자본주의적 속성 때문에 가능합니다.

셋째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욕구나 욕망은 모두 어떤 결여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욕구가 단순히 부족함을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욕망은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여전히 충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욕구보다 좀 더 복잡합니다.

욕망이란 욕구가 기묘하게 뒤틀려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욕망은 동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지요.

인간은 애피타이저를 먼저 먹고 완전한 충족은 뒤로 미루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성적으로 몸을 팔지 않았을 뿐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우연성의 감정가치는 바로 경이로움의 정서입니다.

도박은 가능하기만 했던 것이 바로 눈앞에서 실현되는 순간

경이로움이라는 극도의 흥분된 감정, 성적 쾌감보다도 더 큰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주목할 점은 파리의 젊은 여성들이 몸을 팔아 번 돈이 어디로 흘러가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선물, 옷이나 모자 등을 만들어 파는 산업자본인 것입니다.

 

사랑은 타자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근원적 욕망입니다.

 

매매가능성이야말로 근원적 미덕입니다.

 

그는 아비투스를 구조화된 구조이자 구조화하는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vanity)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허영이라는 인간의 치명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간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로빈슨은 이미 알아버렸습니다.

자신의 삶에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내재적 목적이 있다는 것,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결코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니체라면 이를 초인이라고 불렀을 테지요.

 

산업자본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가장 잘 파악하고 그것을 집요하게 이용했을 뿐입니다.

부자들의 사치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립니다.

 

상품을 필요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산업사회의 기본 생존룰이죠.

 

바타유의 일반경제론에 따르면 필요보다 중요한 것은 사치이고

생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비이며 축적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가없는 선물입니다.

 

니체의 주장처럼 바로 지금 그리고 이곳의 삶,

이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선택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가 고통스러울 경우 그 고통은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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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 허영 따위는 모두 인간의 우월욕망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특유한 선험적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후천적인 교육과 경험의 산물입니다.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나 주변으로부터 교만과 우월의식을 배워 익힌거죠.

그것은 일면 인간의 생존이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 삶을 의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왕자병 공주병 따위가 그 예인데 왕자나 공주처럼 살려는 의지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고귀하게 이끌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신사도, 공자님의 군자론, 조선시대 선비정신 따위가 모두 맥락을 같이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우월욕망은 사치와 허영을 낳았고 

결국 자본주의를 탄생시키고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엔 주로 개인 또는 국가간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했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는 이성적인 사회라기 보다는 감성적인 사회였기 때문이죠. 

패션을 포함하여 자본주의가 가져온 병폐적 요소들을 바로잡고

올바른 진화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바로잡으려는 다수의 의식있는 중산층이 필요합니다.

일시적 유행보다는 본질이나 실존으로 살아가는 의식있는 중산층이 

산업자본주의의 방향을 결정하고 주도해 나가야

세계 문명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상류층의 교만과 허영에 놀아나는 사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