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명강 중에서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왕과 왕비들의 미라, 석관, 피라미드 등은 모두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곧 이집트의 문명이 죽음의 문명이었음을 뜻합니다.
그들에게는 삶보다 죽음이 더 중요했지요.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에게서 받아들인 문명을 생의 찬미와 인생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꼭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플라톤은 정의를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일을 함이 올바름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정의란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국가는 스파르타처럼 군주 즉 통치자가 늘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용기입니다. 국민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절제입니다.
이상적인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연결됩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끊고 밖으로 뛰쳐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용기는 어떻게 생길까요? 갈망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고 갈망할 때 우리는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 갈망은 에로스를 통해 발현됩니다.
이때의 에로스는 숭고한 사랑입니다.
타자에 대한 숭고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내가 늘 인간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데아를 한번 본 사람에게 에로스가 깃들어 숭고한 사랑의 감정이 깃들면
동굴 안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환영을 진리라고 믿는 동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갈망과 에로스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 에로스의 실현을 통해서 우리는 동굴 속에 갖혀있던 동료의 쇠사슬을 풀어주고
함께 동굴 밖으로 나가 참된 이데아의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갈망과 사랑을 통해 이웃에 대한 관심을 실천해야 합니다.
스파르타는 군사적으로는 매우 강한 나라였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매우 배타적인 국가였습니다.
스파르타 사회에서는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회는 점점 폐쇄적인 사회로 굳어지게 됩니다.
반면 로마인들은 끊임없이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곧 로마인들이 세계와의 소통, 개방성을 추구했다는 뜻입니다.
(동 시대에 중국에서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폐쇄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가져오지만 결국 진화를 가로막습니다.
진화하는 종만 살아남습니다.
근육이 파열을 통해 성장하듯 고통이 진화와 성장을 낳습니다.)
절대권력의 서사시 니체와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삶에의 의지. 나는 그곳에서 항상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들이 더 많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나의 사악한 시선이자 귀이다.
삶에서 가장 큰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위험하게 느끼는 것은 권력이다.
니체가 매력적인 것은 자신이 사유한 것들을 실제로 삶에 철저하게 적용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시민을 위한 것이므로 시민으로부터 나와 올바르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철인 가운데 찾아야 합니다.
철학적 사유를 많이 한 사람이라야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권력이 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권력의 속성상
그런 자격있는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권력은 대부분 올바른 절차에 의해서 승계하거나 부여받지 않고
속임수나 계략, 무력을 통해 빼앗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이성은 여자와 같은데 이는 가면을 잘 쓰고 잘 변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구별하기 이전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면
어떤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입에 올리기만 하면 사회로부터 베제당하고 억압당해왔던 그 권력이란 단어가
세상의 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위버멘쉬는 인간 존재의 의미, 자기극복, 자유정신, 창조자 등을 의미합니다.
자기극복을 위해 기존의 모든 관습과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 모든 편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죠.
그러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 권력에의 의지가 있습니다.
the will to power는 인간의 의지는 항상 권력을 지향한다는 의미입니다.
니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너희들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위대한 작품은 바로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내 삶을 만듭니다.
창조의 의지를 가진 것 그것이 바로 권력의 핵심입니다.
진정한 권력자는 사랑이 흘러넘쳐서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약점 허점들을 다 감싸안을 수 있습니다.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도 자기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쉽기 허용하고 인정하고 평가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최고의 권력자는 사랑을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영원회귀를 주장합니다.
영원회귀란 곧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인간이 견뎌내기 가장 힘든 운명 중 하나는 나의 삶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너는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다시 한번 아니 수없이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영원회귀사상입니다.
결국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영원회귀의 정치적 의미는 창조입니다.
낙타의 순종, 복종, 짐은 인생을 황폐화시킵니다.
사자는 나를 억업 했던 굴레를 깨뜨릴 수 있는 자유정신입니다.
어린애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며 계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보여주는 끊임없는 긍정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네가 다시 태어나기를 영원히 바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라.
(니이체 그는 나처럼 사랑을 외치는 철학자입니다.)
단테의 신곡
신곡의 주요 주제는
1. 사랑입니다.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베아트리체) 창작의 신(뮤즈)으로서의 사랑입니다.
2. 구원입니다.
3. 공동체입니다.
4. 기억입니다.
5. 정의입니다.
햄릿은 지성적 인간의 비극이라고 합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의 비극이라는 거지요.
(이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베이컨의 복수자의 시간이란 복수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과거가 언제나 현재처럼 살아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과거와 다른 시간이 찾아올 수 없으며 현재도 미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네가 죽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모든 물체와 물체 사이에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
초자아는 일부는 무의식의 세계에 있고 일부는 의식의 수면 위에 떠 있습니다.
자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자아가 우리 의식의 대변자라고 알고 있던 것과 달리
프로이트는 자아의 상당부분이 무의식임을 주장합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매우 합리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현실을 대변하니까요.
초자아가 강한 사람은 매우 도덕적인 모습을 보이며
이드가 강한 사람은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갈등이 있는 사회가 지극히 정상입니다.
갈등이 있기에 모든 것이 각각의 역할을 하면서 나름대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드는 자신을 좀 더 잘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도와 줄
마음의 또다른 부분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 때 이드에서 분화된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자아는 이드를 무조건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기 위해 분화한 것이다.
그리고 자아는 자신의 신체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형성됩니다.
다시 말해 자아는 내가 동일시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원래부터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자아가 지나치게 강하면 우울증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울증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가치함, 죄책감, 세상에 대한 비관 등은
초자아가 자아를 몰아붙여 완전히 그로기상태로 빠뜨리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에로스는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탄생의 신입니다.
모든 것을 뭉치게 하여 우리의 삶을 묶어주고 유지하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타나토스는 그 반대 개념으로 파괴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타나토스는 쾌락원리의 극한까지 가보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유기적인 존재이므로 극한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
래서 인간의 쾌락적이고 불쾌한 갈등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정말로 긴장이 제로가 되는 상태로 가려는 것 그것이 타나토스입니다.
쉬고 싶고 안식을 얻고자 원래의 무기물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적 환상들이 단순한 증상들이 아니라 환자가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중요한 명제는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댐이 무너지게 하지 않으려면 적절히 수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과거의 기억은 영상테이프처럼 저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과 현재의 기억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내세우는 인격은 페르조나입니다.
(실체가 아니고 가면처럼 그냥 만들어진거죠.
따라서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해도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질료와 형상이 상보적인 관계에 있어
서로를 완성시켜주므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일원론을 주장합니다.
형상은 반드시 어떤 목적을 지닌다고 본거죠.
그래서 만물엔 목적, 의도가 있다는 결론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과연 물질에 의도나 목적이 있을까요?
이렇듯 살아있지 않은 대상도 생물체에 근거해 설명하려는 태도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게 기본적으로 있었다면
데카르트나 뉴턴과 같은 학자로 대표되는 근대 과학은 이를 거부합니다.
목적이나 의도는 정신적인 존재에게만 있다고 보는 거죠.
데카르트는 형상과 질료를 완전히 구분하는 이원론을 주장합니다.
즉 존재하는 것에 정신적인 것이 있고 물질적인 것이 있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물질에는 어떤 의도나 목적 같은 것이 없고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거죠.
물질계는 예외 없이 모두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성에 근거하여 세계를 재구성했을 때 정신적인 존재와 물질적인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다는 획기적인 통찰 때문에 우리는 데카르트를 읽고 있습니다.
이성에 근거해 세계나 인간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나름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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