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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드 보통)

by 굼벵이(조용욱) 2019.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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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그가 25살 나이에 썼다니!

역시 그는 천재다.

갑자기 내가 사정 후의 고추처럼 쪼그라든다.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은 꿰뚫어 보지 않으려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따위를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녀의 웃음의 입 꼬리에서 유혹의 흔적을 찾아낸 것 같은데 맞나? 아니면 나의 욕망이 순수의 얼굴에 투사된 것뿐일까?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는 사람이나 절대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히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줄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찬양 하다가 결혼이 위선이란 이유로 간통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개인적 특징을 버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다

생각이란 판단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판단이라고 하면 무조건 부정적인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편집증 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상태 때문에 모든 상처 받을 만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침실에서 생각은 늘 수상쩍은 것이 된다.

성기의 크기 색깔 냄새 작용을 중심으로 다양한 컴플렉스들이 생겨 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침실에서는 모든 평가적 판단을 흔적도 없이 없애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침실에서는 연인들이 생각의 소리를 삼켜 버리는 숨소리 '나는 정열에 사로 잡혀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라는 메시지를 확인해 주는 숨소리만 들린다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서양 사상의 오래되고 우울한 전통은 사랑은 본질적으로 보답 받을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상호간의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욕망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목표를 성취하면 '침대에서 건 어떤 식으로 건'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 하면 소진 되어 버린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 주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해서 만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하여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개나 고양이나...)

 

상대가 우리더러 마음대로 살라고 하면 그것은 보통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이 오래 전에 사라져버리고 껍질만 남은 결혼. 각방을 쓰면서 출근하기 전에 부엌에서 만나 몇 마디 건네는 관계. 상호이해에 대한 희망은 오래 전에 포기하고 대신 통제된 오해에 기초하여 미지근한 우정을 지속하기로 합의한 관계. 저녁에 세퍼즈 파이를 함께 먹을 때에는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지만, 새벽 3시에는 잠을 못 이루고 감정적 좌절에 가슴 아파하는 관계.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일수도 있다.

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짜증의 벽들을 따라서 늘어서 있었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라고 스탕달은 말했다.

 

진정한 미(美)는 아슬아슬하게 추(醜) 를 희롱한다.

자기 자신에게 모험을 건다.

비율의 수학적 규칙에 편안하게 안주하지 않고 모험에 나서서, 추로 미끄러질 수도 있는 바로 그 세밀한 곳들에서 매력을 발산한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나의 상상력은 클로이의 치아 사이의 틈에서 노는 것을 즐겼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헝클어져 있었기 때문에 창조적 재배치가 기능했다.

클로이의 얼굴은 그 모호함 때문에 오리와 토끼가 둘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비트겐슈겐슈타인의 그림과 비슷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사랑은, 적어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이젠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사람이란 절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바탕에는 주관적이고, 또 어쩌면 환상적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는 월의 질문 덕분에 한 사람에게 속해 있는 특질과 연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특질 사이를 깨닫게 되었다.

월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클로이는 부모에게 느끼던 감정 때문에, 그 들에게 자신이 눈을 감고 그들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죽일 수 있다고 [적대적인 충동의 힘과 마주한 여덟 살짜리 소녀답게 싱긋 웃으며] 말했던 것이다. 물론 이 계획은 부모에게서 심오하게 비철학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릇된 판단들을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고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연인에게도 네 사랑으로 꽉 채워진 이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상상한 것에 불과하냐 하는 질문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섹스는 범죄가 아니라 의무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자아는 유동체이기 때문에 이웃들이 윤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을 얻으려면, 근처에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의미론적으로 볼 때 사랑과 관심이 거의 맞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나비를 사랑 한다는 말의 의미는 "나는 나비에 관심이 많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 규정적인 형태가 없을 뿐이다.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나의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은 나의 진지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나를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보자 다른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은 보통 소리 없는 과정임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반응을 통해서 그것을 채택하라고 암시할 뿐이다.

은밀하게 우리에게 정해준 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클로이는 내가 이젠 귀엽지도 않게 미친 짓을 한다고 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늘 지금 그렇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철학자들이 종종 이성에 따른 삶을 옹호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욕망에 의한 삶을 비난해 왔다면 그것은 이성이 지속성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현재 속에 미래에 들어있을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이것은 나는 이런 식으로 너를 사랑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싫다는 근본적인 주장과 통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스칼의 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책의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바깥 세계는 꿈이나 다름없이 비현실이 된다.

 

증오는 사랑이라는 편지 안에 감추어진 글자들이며 하나의 기초 위에 그 대립물과 함께 서 있다.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정치적 대화를 통해서 불만을 해소하지 못하면 피해를 입은 쪽은 필사적으로 테러 행동에 의존하게 된다.

상대에게서 평화적인 수단으로 유혹해내지 못했던 양보를 힘으로써 이끌어 내려는 것이다.

정치적 테러리즘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상황에서 태어난다.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화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너그러운 일이다

 

삐친 사람은 복잡한 존재로서 말없이 이해받기를 원한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낭만적 테러리즘은 자신의 요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그 요구를 부정해버린다.

테러리스트는 결국 불편한 현실, 사랑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사랑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야.

느끼는 것과 하는 일이 모두 강렬해진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사랑의 종말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칸트 이론의 핵심은 도덕성이란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동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사람도 받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을 맛보았다면, 이것이 과연 도덕적인 언어를 사용할 문제일까?

 

나는 자유의지를 믿었던 오만을 회개했다

 

사랑에서 버림받은 뒤에 자살하는 것 보다 합리적인 반응이 어디 있겠는가?

클로이가 진정 내 삶의 모든 것이었다면, 그녀 없이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삶을 끝내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을까?

 

인간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그 바람에 자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는 광경을 지켜볼 수도 없다면 그런 장면을 연출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햄릿에 대한 내 대답은 사는 동시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통이 정점을 넘어버리자 기쁨의 골짜기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기쁨, 예수 컴플렉스의 기쁨이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착하고 완전히 의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배반당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신약성서가 비애감을 주는 것은 그것이 내 사랑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모든 덕을 갖추었지만 그럼에도 오해받은 존재의 슬픈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인물은 모든 사람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사람들은 그 관대한 메시지를 그의 면전에 내던져 버렸다.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덕은 커진다.

예수 컴플렉스는 우월감과 엮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