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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자전거 여행 (김훈)

by 굼벵이(조용욱) 2019.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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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는 징그러운 애벌레다. 
누에가 든 채반 위에 뽕잎을 얹으면 갑자기 소나기 내리는 소리가 난다.  
쏴아아~~~~ 
뽕잎 먹는 소리가 한여름 잠깐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와 흡사하다. 
그 징그러운 벌레는 어느날 식음을 전폐하고 가지 끝에 매달려

그동안 먹었던 음식을 토해낸다.  
내장까지 사정없이 토해내고 나면 징그럽던 애벌레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토해낸 음식물들은 천상의 선녀가 목욕하러 내려올 때 입었던 속옷 같은

명주실로 변하여 가장 완벽한 질감과 형태로 아방궁을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최고의 균형미를 자랑하는 고치가

예쁘게 가부좌를 틀고 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들어있는 글들은 대체로 이런 모양새다.  
아름다움이나 행복은 창조하는게 아니고 발견하는거다.  
누에나 시든 뽕잎 같은 추하고 흔해 빠진 현실 안에서

지상 최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내고 끄집어내어 잘근잘근 씹으면서

행복을 우려내는게 그의 생각이고 '자전거 여행'이다.

아래 글들을 읽으면 그게 바로 확인된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강물이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버리면서 거느리듯이, 자전거를 저어 갈 때 지도 위에 머리카락처럼 표기된 지방도•우마차로 • 소로 • 임도 • 등산로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 나간다.

생사는 자전거 체인 위에서 명멸한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자전거는 땅 위의 일엽편주처럼 외롭고 새롭다.

  

가장 완강한 가파름을 가장 연약한 힘으로 쓰다듬어가며 자전거는 구비구비 산맥 속을 돌아서 마루턱에 닿는다.

    

동백은 한송이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뿜어져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 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 있다.

그래서 매화의 구름은혼곤하고 몽롱하다.

이것은 신기루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선암사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오리를 지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니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 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 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꽃은 사람을 쳐다보지 않고, 봄빛 부서지는 먼바다를 쳐다본다.

바닷가에 핀 매화 꽃잎은 바람에 날려서 눈처럼 바다로 떨어져내린다.

 

매화 꽃잎 떨어지는 봄 바다에는,

나고 또 죽는 시간의 가루들이 수억만개의 물비늘로 반짝이며 명멸을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