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세상을 바꾼 이슬람(이희수)

by 굼벵이(조용욱) 2019. 9. 2.
728x90


무슬림의 다섯가지 의무는

ㅡ유일신인 알라만을 믿으며 무함마드가 그의 예언자임을 선서하는 신앙고백을 하고

ㅡ하루 다섯 차례 예배를 드리고

ㅡ자선을 위한 종교세를 내고

ㅡ라마단 기간 동안 해가 떠있을 때 단식하고

ㅡ평생에 한번은 이슬람 성지인 메카를 순례하는 것이다.

 

미망인이던 상인 카디자(40세)가 고용인인 무함마드(25세)에게 청혼

무함마드는 결혼 후 여유로운 환경에서 그동안 품어오던 사회적 악습과 모순에 대해 고뇌하면서 명상을 시작했다

40세가 되던 610년 드디어 메카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알라의 첫 계시를 받았다.

알라가 글자와 학문에 무지한 무함마드를 선택하여 22년에 걸쳐 내려준 계 시는《꾸란》으로 집대성되었다.

 

ㅡ무함마드는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이 전례는 유산 대부분을 이웃에게 환원하고 최대 1/3 이하만 자식에게 물려주는 유산상속의 전통이 되었다.

ㅡ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ㅡ신이 아닌 순수한 인간이었다

ㅡ적에게 관용을 베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낮춤의 자세를 보였다.

ㅡ종교적 열정과 온화함을 조화롭게 행동으로 보인 지도자였다

ㅡ여성에 대한 지위와 인식을 혁명적으로 바꾼 페미니스트

 

자신의 재산과 수입을 나누는 것을 종교적의무로 정해 놓았다

이를 '자카르'라고 하는데, 다른 종교처럼 십일조라는 엄격한 강제 규정을 적용하지 않고 자율성이 주어진다

희사하는 비율도 수입의 40분의 1로 부담이 크지 않고, 희사금을 내는 시기나 납부처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종교적 의무인 자카트와는 별도로 '사다카'라는 자율적 희사 제도도 열려 있다

공존과 나눔 정신이 가장 중요한 종교적 덕목으로 일상생활 속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셈이다

이슬람에서는 자본주의와 개인 재산을 인정하지만 개인이 축적한 재산은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에 속한다는 절대적 한계가 있다.

개인이 모은 재산은 신이 현세에서 맡긴 것일 뿐이며, 다른 사회 구성원의 협력과 희생 위에서 얻어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런 정신은 '삼분상속'이라는 오랜 이슬람 관습에서도 나타난다.

유산의 3분의 1은 일종의 상속세로 국가에 헌납하고,

3분의 1은 자선단체나 가난한 이웃에게 희사하고,

나머지 3분의 1을 가족에게 물려준다.

자식들의 몫도 전부 상속하기보다는 자발적 의사에 따라 기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와카프'라는 자선단체가 조직적으로 운영된다

와카프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호와 복지를 위해 1000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상적이고 실질적인 이슬람 기구다

현재 와카프는 많은 이슬람 정부에서 하나의 조직으로 승격되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기도 하지만 정부 조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와카프야말로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일반화된 복지재단이나 자선단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라마단은 아홉 번째 달 한 달 동안 단식을 한다.

해가 뜨기 전 일찍 일어나 미리 새벽식사를 하고 해가 진 뒤에도 식사를 할 수 있다.

새벽이 되면 모스크에서 나온 북치기가 동네를 돌면서 북을 두드려 사람들을 깨운다.

일몰을 알리는 아잔소리와 함께 단식이 끝난다.

아잔은 예배가 시작됨을 알리고 예배를 보러오라고 외치는 낭송이다.

아잔을 부르는 사람을 무에진이라 한다

더운 지역에서 육식 위주의 기름진 식사를 하고 운동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에서 단식은 체중조절에 탁월한 방법이다.

 

예금자가 저축한 돈을 은행이 기업에게 맡겨 경제활동을 하고, 그 이익의 일부를 이자로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은행은 이슬람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생각에 기초하여 이슬람 은행은 이자 없이도 잘 운영된다

실제로 이슬람 사회의 많은 시민들이 확정 이자도 없는 이슬람은행에 예금을 한다.

이슬람 은행의 배당금이 서구식 시중 은행보다 높기 때문에 이슬람 은행으로 돈이 몰리는 것이다.

 

이슬람이 피지배 민중들에게 스며들 수 있었던 마력가운데 조세제도가 큰 몫을 차지한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토지 공개념 제도를 도입했다.

누구든지 경작지에서 자유롭게 수확하고, 정부에 25퍼센트 정도의 토지세 카라즈를 내면 개인 재산이 인정되있다

이것은 오랜 수탈 경제에서 예측 가능한 경제로 나아가는 극적인 삶의 변화였고, 일종의 조세 혁명이었다,

나아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약 10퍼센트에 해당되는 인두세 지즈야까지 면제해 주었다.

인두세는 소득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세금을 매기는 조세 형태를 말한다

이러한 정책은 피정복 주민의 환영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오늘날 에스파냐 땅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800년 가까이 이슬람 세계에 속하면서 중세 최고 수준의 학문, 과학, 예술, 문화의 결실을 유럽에 전해 주는 지적 창구 역할을 했다.

그들에게 천문학은 생존을 위한 학문이었다

달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이슬람 달력을 만들어 사용했고,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매일의 예배 시간과 라마단 달의 단식 시간을 측정했다.

매일 다섯 차례의 예배를 위해서는 메카 방향을 정확히 측정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교역과 전쟁, 물을 찾아가는 여정은 태양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낮보다는 밤이 유리했다

그래서 유목민과 카라반은 주로 밤에 이동해야 했다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없는 막막한 사막에서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따라서 유일한 길잡이인 별과 달을 관측하여 정확한 방향을 잡아야 했다

오랜 경험과 정확한 별자리 계산으로 어느 한 곳에 도착하여, 사방의 지평선을 둘러보아 목표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면 계산이 틀린 것이다

이럴 경우 잘못 계산한 사람만 곤란해지는 게 아니라 카라반이나 부족 전체가 방향을 잃고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정확하게 별자리를 계산해야 한다.

아랍의 오아시스 유목사회에서 천문학이 발전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천문학의 영어 표현 'astronomy'는 아랍어에서 유래되었고, 인류가 사용하는 별자리 이름의 약 70퍼센트가 아랍어에서 유래되었다.

 

도금이나 염색 기술, 유리 제조, 아세트산이나 시트르산 추출 같은 화학적 성과를 인류에게 선물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알코올 증류법의 개발이었다.

소주는 아랍의 알코올 증류 기술로 만들어진 술이다.

이후 소주는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졌는데, 우리나라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들어왔다.

소주를 아랍어로 '알아락'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고려 말에 소주가 도입되었을 때 '알라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증류 기술이나 문화뿐 만 아니라 용어까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왜 이슬람에서 건축술이 이토록 발달했을까?

이슬람은 우상 숭배를 철저하게 금지하는 율법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인물이나 동물상을 예술적 형태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미술의 가장 중요한 분야인 회화와 조각에서 인물과 동물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예술적 표현은 제한되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신들을 묘사하고 성인들까지 누드로 표현하는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미술과는 대조적이다

열정과 예술혼에 불타는 예술가들은 건축에 그들의 기량을 집중했다

동물과 인물 형상을 제외한 채 꽃과 나무, 성스러운《꾸란》의 아랍어 글씨를 가지고, 기하학적인 구도와 '아라베스크'라는 양식을 개척하여 모스크와 왕궁, 정원과 학교를 꾸몄다.

천장과 벽면, 바닥에 한 치의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 꽉 찬 예술적 표현 기법을 선보이면서 놀라울 정도의 예술성을 나타냈다

모스크를 중심으로 이슬람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구조와 실내 장식으로 보는 이의 찬사를 자아낸다.

 

이슬람에서는 음악 또한 금기시했지만 일정한 기법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운 음률의《꾸란》낭송은 최고의 음악으로 간주되었다.

아랍 문학은 이슬람 이전에 유목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정열적이면서 현세를 노래하는 시와 노래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압바스 시대 이후 이슬람 문학은 페르시아 문학의 영향을 받아 산문이 발달하고 궁정문학이 유행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아라비안나이트》로 알려진《천일야화》다. 이 작품은 설화집인《천화》를 바탕으로 한다.

9세기경 아랍어로 번역되어 구전되었고, 아라비아와 인도를 비롯한 이슬람 세계의 다양한 요소가 복합되어 대표적인 이슬람 문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행자들은 날이 어두워져 갈 곳이 없게 되면 무조건 모스크로 찾아간다.

그곳에는 가난하고 지친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가 준비되어 있다.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필요하면 약간의 여비도 마련해 준다.

여행자를 보살피는 것은 이슬람사회가 간직해 온 오랜 전통이다

사람들은 여행자 주변에 몰려들어 지나온 여정과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다

여행자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정보 제공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슬람 문화는 이처럼 모스크라는 공간을 통해 세상을 호흡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 발전해 갔다.

 

미나레트는 신을 향한 열망인 동시에 주민들을 하느님 품으로 초대하는 외침의 장소다.

무에진이 미나레트 꼭대기에서 매일 다섯 차례 낭랑한 목소리로 아잔을 외친다.

“신은 위대하다.

우리 모두 예배를 보러 올지니. 알라만이 유일하시고 어떤 신도 없나니. 무함마드는 그분의 예언자임을 증언하나이다.”

예배를 보러 오라는 초대의 낭송이다.

미나레트는 예배를 알리는 아잔을 낭송하기 위해 높이 짓는다.

그런데 미나레트는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스크의 크기에 따 라 두 개, 네 개, 심지어 여섯 개를 두기도 한다. 술탄이나 왕의 이름으로 짓는 모스크는 규모가 크기 때문에 보통 두 개 이상의 미나레트가 있다

둘째는 모스크 예배당 안에 '민바르'라는 설교단을 꾸민다

이슬람의 합동 예배인 금요일 낮의 주마 예배 때 이맘이 설교를 하는 곳이다

세 번째로 모스크의 가장 중요한 시설은 '미흐랍'이다

모든 무슬림은 하나의 집이 있다고 믿는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의 예배를 올린다.

따라서 예배를 드리는 방향인 메카를 표시하는 벽감인 미흐랍이 가장 중요하다.

 

모스크 안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대신 꽃과 나무를 상징하는 무늬와 하느님의 말씀을 아랍어로 기하학적으로 배치하여 예술성을 표현했다

이것을 '아라베스크'라 한다.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벽면은 푸른빛이 도는 타일로, 바닥은 온갖 색감과 형태를 가진 아라베스크 무늬의 카펫으로 꾸며 놓았다.

 

이슬람 예술은 작품에 사람이나 동물을 표현하지 않는다.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이 우상 숭배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들이 성화나 성물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경멸했다.

하느님 외에는 누구도 섬기지 말고,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거나 경배하지 말라는 이슬람의 가르침 때문이다

아라베스크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종교적 배경에서 피어난 대안적 예술이자 새로운 문화였다.

 

아라베스크는 반복과 대칭이 특징이며,《꾸란》구절을 아랍어 서체로 꾸며 장식한다

모든 예술은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과 대칭 구도 자체가 바로 오묘한 신의 예술이다

 

용은 중국에서는 황제의 뜻을 내포하지만 페르시아에서는 악마, 인도에서는 죽음을 뜻한다.

페르시아 카펫에 간혹 등장하는 날짐승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선과 악의 싸움을 뜻한다

꽃이나 식물 무늬에도 특별한 뜻이 있다.

실삼나무는 슬픔과 사후의 불멸을, 대추야자나 코코넛 나무는 축복과 충족을 뜻한다.

작약은 부를, 연꽃은 가문의 영광을 뜻한다.

기하학적 무늬에도 의미가 부여되었는데, 중국에서 만卍자 무늬는 평화를 상징한다.

간혹 이슬람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초승달은 진리의 시작이자 신앙심을 뜻하고, 끝없이 연결되는 매듭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는 지혜와 불멸을 뜻한다.

 

커피는 이슬람 문화의 꽃이다.

'커피'는 아랍어 '카흐와'에서 유래되었다.

아랍에서 처음 약용으로 마시기 시작했고, 아라비아 남부에 이슬람을 받아들인 뒤에는 명상을 위한 음료로 대중화되었다.

잠을 쫓는 카페인 성분은 밤 문화 중심인 중동의 환경에 그대로 스며들었고, 상업적 이익이라는 엄청난 매력 때문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유럽을 변화시키고, 세상 사람들을 커피로 빠져들게 했다

오늘날 커피는 물 다음으로 인류가 많이 마시는 음료이자, 석유 다음으로 거래량이 많은 상품이 되었다.

인류는 매일 30억 잔 가까운 커피를 소비하고, 수천만 명이 커피 산업에 종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커피는 없어서는 안 되는 삶의 필수품이 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정착된 커피 문화가 이토록 광범위하게 세상을 바꿀 줄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커피는 무슬림들의 자긍심이고, 신이 내린 선물이다.

만약《꾸란》이 계시될 때 커피가 알려졌다면 틀림없이 대추야자만큼이나 예찬의 대상이자 예언자 무함마드가 최고로 좋아하는 음료가 되었을 것이다.

커피를 처음 마시고 알려지게 된 곳은 아라비아 남부, 예멘의 모카 지방이었다.

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의 카파 지방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동부 아프리카의 뾰족한 곶을 따라 좁은 홍해를 건너면 바로 모카 지방이다.

인간이 커피의 효능을 알고 의도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15세기경 예멘의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명상과 기도를 해야 했던 그들에게 커피는 최상의 효과를 주었다.

 

오스만 터키를 꺽기 위해 영국은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결국 아랍 민족을 회유하여 이슬람 종교를 배반하고 같은 형제인 오스만 제국의 등에 칼을 꽃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서구 기독교를 향해 지하드-성전을 선포한 아랍으로서는 알라를 배반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대가로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알려진 비밀 협정으로 전쟁 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국가의 독립을 보장해주었다

이에 따라 아랍 민족들은 일마 전까지 지하드의 대상이던 영국을 위해 형제 나라인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종교적 신념마저 버리는 운명적 선택을 했지만, 영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으로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합의했고, 급기야 2,000년간 아랍인들이 살아온 땅을 유대인에게 넘겨 버렸다.

중동 근대사의 가장 아이러니한 지각 변동의 서곡이었다.

종교적 신념을 버린 결과는 처참했다.

아랍 민족들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은커녕 그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서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1948년, 유럽에 버림받은 유대 민족들은 미국 트루먼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아랍 민족들은 힘을 합쳐 이스라엘에 대항했지만 미국과 영국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는 역부족이었다.

1948년, 1956년, 1967년, 1973년, 네 차례의 중동 전쟁 패배를 통해 역사적 상처는 물론, 유대인과 아랍 민족 사이의 오랜 협력과 신뢰의 벽도 무너져 버렸다

 

1990년대는 중동-이슬람 세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중앙아시아의 많은 이슬람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 했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이 새로운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체첸만은 예외였다.

러시아는 석유 자본과 전략적 요충지를 잃지 않으려고 체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파병해 독립 기운을 짓밟고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독립을 쟁취하고 말겠다는 체첸 민족의 처절한 저항과 투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양측이 함께 살기로 약속하고 '땅과 '평화를 교환하기로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는 아랍 영토 일부에 이스라엘 건국으로 오갈 데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거주 공간을 마련해, 궁극적으로는 독립국가를 인정해 주자는 취지였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공존하면서 평화로운 이웃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는 박수를 보냈고, 평화 협상의 주인공인 이차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걸프 해에서는 이라크가 이웃의 형제 국가인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아랍 국가 간에 전쟁을 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다시 한 번 깊은 좌절과 상처를 안게 되었다

쿠웨이트의 요청으로 미국과 다국적군이 이라크와 걸프전쟁을 치르면서, 서방 군대가 아랍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명분과 전례를 아랍 스스로 자초 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에 강경 보수 정치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오슬로 평화협정문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마지막 생존 카드마저 던져버린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중과 이슬람 세계가, 이스라엘과 그의 일방적 후원자인 미국에 대해 갖는 반감과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알카에다 같은 이슬람 급진 세력이 존재의 의미를 다시 갖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서방 세계, 특히 미국이 이스라엘을 두둔하고 무고한 팔레스타인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해도 일관되게 방관하는 태도는 이슬람 급진 세력들을 극단적인 반미-반이스라엘로 몰아갔다.

 

지금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1948년 미국이 주도해 들어선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2,000년 동안 살아온 자신들의 땅을 돌려 달라거나 배상하라는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상호 불가침을 통해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 기준은 국제법이 정한 원칙과 서로 합의한 약속이다.

 

영토 분쟁의 핵심은, 1967년 6일 전쟁(제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자국 영토를 넘어 이웃 아랍 영토를 침략하고, 강제로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1967년 11월 2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조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가자 지구, 웨스트뱅크, 골란고원, 시나이 반도 등 아랍 점령지에서 즉각 철수하고 영토를 반환하라고 촉구했다.

이 중 불모의 땅 시나이 반도만이 1978년 9월 17일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이집트에 반환되었을 뿐이다

나머지 아랍 영토는 아직도 유엔 결의안이 무시된 채 40년 가까이 이스라엘이 강제로 점령하고 있다.

더 나아가 조직적으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영토를 영구화하려고 하고 있다.

 

1993년 맺은 오슬로 평화협정은 이스라엘 당국이 서명한 가장 포괄적인 평화안이었다.

'땅과 평화의 교환으로 알려진 이 협정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중심으로 한 온건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호 불가침을 보장하는 대가로, 이스라엘이 국제법상 돌려주게 되어 있는 아랍 점령지 일부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보장받았다

이는 이스라엘 건국으로 오갈 데 없어진 500만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위한 최소한의 자치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장기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을 인청해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마스를 비롯한 이슬람 강경 세력과 50년 가까이 난민 생활을 하고 이스라엘에게 가족과 친지를 잃은 많은 팔레스타인 민중은 이스라엘을 면죄하고 그들의 종복으로 살아가기를 강요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한 자유와 원상회복을 외치며 저항했다.

힘의 열세에 놓인 그들의 지도자는 이스라엘군과 정보 당국의 공개적인 표적 테러로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1988년에는 이스라엘 점령지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치와 자유를 외치며 민중 봉기(인티파다)를 시작했지만, 이스라엘의 무차별 사격으로 진압당했다.

하마스가 결성된 것도 그때였고, 그때부터 이스라엘군을 향한 격렬한 무장 저항이 시작되었다.

 

2000년 이후 오슬로 평화협정마저 이스라엘 극우파인 샤론 정권에 의해 유린당하고 팔레스타인 독립의 꿈이 위협받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살 폭탄 테러로 이스라엘에 대항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후원자로, 학살의 방관자로 일관했다

이런 왜곡된 상황에서 9 • 11 테러가 알카에다 같은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났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은 국제법과 유엔 결의안의 범주에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 점을 국제 사회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