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by 굼벵이(조용욱) 2019. 12. 14.
728x90

이처럼 감정이입된 책은 일찌기 없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내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고 주인공 이반일리치는 곧 나였다.

즉 죽어가는 나였다. 

지금 나의 심경과 너무도 흡사하게 일치한다.

그의 주변사람들도 모두 나의 주변사람들과 다름 없다.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과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이처럼 명확히 묘사한 작가는 없다.

톨스토이 그는 말 그대로 최고의 소설가요, 사상가다.

왜 그런지 그의 글을 직접 보자

***************


아주 가까운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나 그렇듯이 그들도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는 해야 할 일을 다했고 또 제대로 해냈다는 표정이 담겨져 있다

그 외에도 그의 얼굴에는 산자들에게 뭔가를 질책하거나 경고하는 듯한 표정도 엿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제복을 맞추라고 돈을 주었다 그는 그 돈으로 최고급 샤르메르 양복점에서 옷을 맞추고 라틴어로 '마지막을 예견 하라'라고 새겨진 장식용 메달을 줄에 걸어달고 멋을 부렸다

(복선인 것 같다)

 

그리고 서류상 기록할 때에는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완전히 배제하고 사실 자체만을 반영하며 특히 형식적으로 요구되는 모든 사항을 엄수함으로써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라도 쉽게 처리하는 능력을 발휘했다(전형적인 공무원상)

 

그는 가족과 지내는 시간을 점점 더 줄여 나갔고 함께 있어야 할 경우에도 가급적 다른 사람들을 불러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을 지키고자 했다

이반일리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 속에 파묻혀 오직 거기서 삶의 재미를 느꼈다

돌아오는 길 내내 그는 의사가 한말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며 복잡하고 모호한 전문 용어들을 평범한 말로 바꿔서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그가 행하는 법률용어도 일반인이 느끼기엔 그와 같았음을 암시)

 

이반 일리치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그런 심각한 일이 그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 뿐이었고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세상사가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점이 무엇보다 이반 일리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렇게 그는 파멸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이해하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야만 했다

 

죽음 그래 죽음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즐겁게 놀기나 하는 구나.

다 마찬가지다

저들도 모두 죽을 것이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너희들은 좀 나중일지 몰라도 죽음을 피할수는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즐거울까 짐승 같은 놈들

 

더욱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죽음이란 놈이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자꾸만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점 이었다

그저 죽음만을 바라보도록 피하지 않고 똑바로 죽음을 응시 하도록 모든 일을 손에서 내려놓고 그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만 했다

그때 다친 옆구리에서 병이 시작되었으니 결국 이방을 꾸미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면 쓴웃음이 나왔다

(결국 자신의 사치성향이 죽음의 원인임을 시사)

 

그가 보기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 무섭고 끔찍한 죽음의 의식을 그저 있을 수 있는 기분 나쁜 일 특히 조금 품위가 없는 일 정도로 격하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평생 지키려고 애써온 품위라는 것이었다

 

게라심만이 거짓말 하지 않았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이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그걸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게라심 뿐으로 그만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쇠약해진 주인 나리를 진정으로 가엾게 여기고 있었다

한번은 이반 일리치가 이제 그만 가라고 하자 게르심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를 좀 못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리던 중 어떤 때에는 사실대로 고백하기 좀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누군가 자신을 아픈 어린아이 대하듯이 그렇게 가엾게 여기며 보살펴 주기를 가장 간절히 소원했다

어린애를 어루만지고 달래듯이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울어 주길 그는 바랬다

 

그녀가 남편의 병에 대한 태도는 의사가 하라는 대로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남편에게 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남편을 사랑하며 어떻게든 잘 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태도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서 한다는 일은 모두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이런 일을 정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말은 이제까지와는 거꾸로 생각해야 만이 할 수 있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다리를 내려놓고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웠다

자신이 너무나 불쌍했다

그는 게라심이 옆방으로 물러나기를 기다렸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없는 무력감과 끔찍한 고독이 사람들과 하느님의 냉혹함이 그리고 하느님의 부재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결혼 너무나 절망적이고 환멸 뿐이었다

아내의 입냄새 애욕과 위선 그리고 죽은 것만 같은 공직 생활과 돈 걱정들 그렇게 일 년이 가고 이년이 가고 십년이 가고 20년이 갔다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었다

하루를 살면 하루 더 죽어 가는 그런 삶이었다

한 걸음씩 산을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걸음씩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거야

그래 맞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산을 오른다고 보았지만 내 발밑에서는 서서히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결국 이렇게 됐지

죽는 일만 남은 것이다

갈수록 고통이 더욱 더 심해지듯이 내 삶의 모든 것은 더욱더 나빠져만 갔군

 

자신의 일과 삶의 방식 가족 사교계와 직장의 모든 이해관계도 다 거짓인지 모른다

그는 똑바로 누워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 아침 시종과 아내 그리고 딸과 의사를 차례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날 밤 깨달은 끔찍한 진실을 그에게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바로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삶도 죽음도 가려버리는 하나의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기만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날 아침 그는 그들 모두가 더욱 증오스러웠다

그게 아니야

네가 살며 의지해 왔던 모든 것은 다 거짓이고 기만이야

너에게 삶과 죽음을 숨기고 있을 뿐이야

 

그것은 사흘 째 되는 날이 저물 무렵 그가 세상을 뜨기 한 시간 전쯤 일이다

김나지움에 다니는 아들이 살금살금 아버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죽어 가던 이반 일리치는 절망적으로 소리치며 필사적으로 손을 내 젓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손이 아들의 머리 부딪혔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아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트렸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 떨어졌고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삶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걸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그게 뭐지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입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뜨고 하늘을 보았다

아들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아내도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코와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도 불쌍했다

그래 내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두 참으로 안됐어

하지만 내가 죽으면 훨씬 나을 거야

그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움직일 수 없었다

데리고 나가 불쌍해 당신도

그는 쁘로스찌(용서해줘)라고 한마디 더 덧 붙이고 싶었지만 쁘로쁘스찌(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을 바꿀 힘도 없어서 손을 내 저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었다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며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 밖으로 두 방향으로 열 방향으로 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가족들이 모두 안스럽게 여겨지고 모두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도 벗어나고 가족들도 다 벗어나게 해 주어야 했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훌륭한 일인가

갑자기 그는 소리쳤다

아 이렇게 기쁠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