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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by 굼벵이(조용욱) 2019.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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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내용들을 사실로서 확인해주는 주옥같은 생각들이 들어있다.

다시 말하면 나보다 5, 60년 이상 오래 전에 사셨던 석학이지만 내가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로

이는 시공을 초월해 인간 본성에 자리 잡은 인지도식은 변함없이 비슷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세계 각지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읽었을 수밖에...

내가 공감하는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배우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기술 예컨대 문학이나 그림이나 건축 또는 의학이나 공학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 자연과 결별하면 인간은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못 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개인으로서든 인류로서든 결정되어 있는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쫓겨난다

확실한 것은 과거뿐이고 미래에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분리 경험은 불안을 일으킨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 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사물과 사람들-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반응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게다가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

분리 상태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심 경험은 성서에 아담과 이브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열매'를 먹은 다음에,

그들이 복종하지 않게 된 다음에(불복종의 자유가 없으면 선 악도 없다),

자연과의 본래의 동물적 조화로부터 벗어나 인간이 된 다음에,

다시 말하면 인간 존재로서 탄생한 다음에,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오래된 단순 한 신화에도 19세기적인 관점인 고상한 척하는 윤리가 있는데, 이 이야기의 핵심을 우리는 성기(性器)가 보임으로써 느끼게 된 곤혹에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며, 이 이야기를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점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곧 남자와 여자가 자기 자신과 서로를 알게 된 다음, 그들은 분리되어 있고. 그들이 서로 다른 성(性)에 속하는 것처럼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남남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아담이 이브를 감싸기보다는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한 사실에서도 매우 명백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이것이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이 목적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실패할 때 광기가 생긴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대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은 하루도 존재할 수 없다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선망, 질투, 야망, 온갖 종류의 탐욕은 격정이다.

그러나 사랑은 행동이며 인간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고, 이 힘은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행사할 수 있을 뿐, 강제된 결과로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남여 사이의 사랑을 통해 남여는 각기 재탄생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원칙은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너는 네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조건부 사랑에서도 우리는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보답을 바라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를 달성하기 못하면 사랑을 잃게 된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사랑의 소극적 측면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본성에는 복종은 주요한 덕이고, 불복종은 주요한 죄라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따라서 (복종하지 않으면) 그 벌로 아버지의 사랑을 잃게 된다.

적극적 측면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부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고 무슨 일인가를 할 수 있고 노력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처럼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지는 않다.

어린이에 대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태도는 어린아이 자신의 욕구와 일치한다.

갓난아이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다.

여섯 살 이후 어린아이에게는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권위와 지도가 필요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기능을 갖고 있고, 아버지는 이 어린이가 태어난 특별한 사회가 던지는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어린아이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상적인 경우에 어머니의 사랑은 어린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기나 무력감을 조장하지 않는다.


어떤 소년이 애정은 있으나 지나치게 방임하거나 지나치게 간섭을 하는 어머니와 약하고 냉담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은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이 경우 그는 어릴 때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 집착할 것이고, 따라서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수용적 인간, 다시 말하면 받아들이고 보호받고 돌봐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특징인 갈망을 갖게 되고, 따라서 아버지다운 성질-훈련 독립심, 스스로 삶을 익혀나가는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 발달한다. 그는 누구에게서나, 때로는 여자에게서 때로는 권위와 권력이 따르는 지위에 있는 남자에게서 '어머니'를 찾으려고 한다.

 

한편 어머니가 냉담하고 동정심이 없고 지나치게 간섭한다면, 그는 어머니의 보호를 바라는 욕구를 아버지에게, 결과적으로 부친상(父親像)으로 전환하거나-이 경우 결과는 전자의 경우와 같다-또는 일방적으로 부친 지향적인 인간으로 발달해서 법률, 질서, 권위의 원칙에 순종할 뿐 무조건적 사랑을 기대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은 갖지 못할 것이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명령에 대한 아들의 복종에 달려있다.

아버지는 가장 자신을 닮고 가장 잘 복종하며 자신의 재산상속자로서 자기 후계자가 되는데 가장 적합한 아들을 가장 좋아한다.

 

신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신은 유한하지 않고 사람이 아니며, '존재'가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이 문장의 가장 적합한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곧 “그들에게 '나의 이름은 이름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라."

헛되이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쓸데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궁극적으로는 신의 이름을 전혀 말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도 동일한 목표, 곧 신은 아버지이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나는 노자의 도가도비상도와 I am who am은 같은 내용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돕지 않는 한 전적으로 외롭다.

신과 나, 우리는 하나다.

신을 인식함으로써 나는 신을 나에게로 데려온다.

신을 사랑함으로써 나는 신에게 침투한다.

신이라는 말은 절대 무 뿐 아니라 부족장을 가리킨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현재의 시장조건 아래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인간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 기계 같은 관계가 되고, 각자는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각자의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되도록이면 타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아주 고독하며, 분리 상태가 극복되지 못했을 때 필연적 결과로 생기는 깊은 확실성과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구실로, 때로는 의무라는 구실로, 이러한 어머니들은 미숙한 남자 아이를 자기 안에 묶어두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런 관계 속의) 남자는 어머니를 통하지 않고서는 호흡할 수 없고 피상적인 성적 차원-모든 다른 여성들을 타락시키는-이 아니면 사랑할 수도 없다.

(이런) 남자는 다만 영원한 불구자 또는 범죄자가 될 수 있을 뿐, 자유로워지거나 독립적이 될 수는 없다.

어머니의 이러한 파괴적이고 흡입하는 측면은 어머니상의 부정적 측면이다.

 

우리의 세속적 생활이 의거하는 원칙은 무관심과 이기주의 원리이다.

사실상 정신을 집중 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리고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러한 정신 집중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습 이외에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곧 음악 감상 독서 사람들과의 대화 경치 구경 등에 전념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 순간 하고 있는 활동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고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사랑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모든 사람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본보기로 보여준 사랑의 성질이다

이것이 자신이 가진 사랑의 능력의 발전을 촉진하거나 마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욕망하고 원하고 집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내겐 인간과 세상이 필요하다

인간의 사랑의 능력은 바이오 필리아 즉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이끌림을 기반으로 했다

 

​그는 인간이 참된 자아를 상실한 것이 사랑을 상실한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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