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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자기계발 산책(2011이전)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

by 굼벵이(조용욱) 2020.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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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목표로 삼지 마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 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영양실조가 수감자들의 정신을 먹는 것에만 집중시키는 현상만 초래하지는 않았다.

수감자들에게 성욕이 없었던 것도 아마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기나니(천사들은 고난과 역경 속에만 찾아든다는 말의 역설)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떼를 지어 무리 한 복판으로 슬금슬금 들어가려는 양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대오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 행렬의 양 옆과 앞뒤에 있는 감시병들의 주먹질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작아지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 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국적으로 분석을 해 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의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시련을 감내하는)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반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그리고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나게 된다.

 

finis 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 없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아있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삶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하는 것이라는 것을.

삶의 의미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이렇게 갖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는 이인증(depersonaliz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꿈에게 사기를 당해왔는가!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환자가 삶의 의미와 직접 대면하게 하고 그것을 향해 나갈 수 있게 도와준다.

 

로고스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빈 제3정신의학파로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도 좌절당할 수 있다.

이것을 로고테라피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한다.

여기서 실존적이라는 단어는 세 가지 의미로 쓴다.

1)존재 그 자체, 즉 인간 특유의 존재방식

2) 존재의 의미 그리고

3) 각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osis)는 욕구와 본능의 갈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원인 중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 라는 니체의 말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정신건강에 대해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불러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낙원에서나 얻을 수 있는 그런 안전함은 이제 영원히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되었으며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저변에 깔려있는 실존적 공허에 대하여 먼저 이해해야 한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 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나는 삶으로부터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짊)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로고테라피 치료사가 하는 일은 화가보다는 안과의사가 하는 일에 가깝다.

화가는 자기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지만 안과의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려고 노력한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존재의 자기초월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 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그는 더욱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은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기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설 수 있다.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시련을 통해서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때에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있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이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1)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2) 죄로부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3)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행복은 얻으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실 기도가 미수에 그친 사람들이 수없이 하는 이야기는 자살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말한 사실이다.

 

내 생각

- 사랑은 무조건적 이끌림이다

- 이끌림은 종족번식의 본능을 충족하기 위한 성충동에 기인한다.

- 자녀나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고 정이다.

- 정이란 동정 연민 보살핌 따위의 감정으로 사랑의 감정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