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12
○ 48. 5. 15 : 이스라엘 독립의 의미
- 이스라엘 인에게는 grand jubilee 에 해당하나
- 아랍사람들에겐 ‘알 나크바’ (대 재앙의 날)
- 같은 나라 같은 직장에서도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이 함께 살아감
- 외신 중 가장 빈도가 많은(40-70%) 것이 중동
○ 중동문제는
- 이스라엘의 안보문제 : 민주당 집권시 주로 강조 : 클린턴
- oil : 공화당 집권시 주로 강조 : 부시
○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
- 야훼(YHWH)는 신이기에 함부로 쓸 수가 없어서 adonai 라는 대명사로 바꾸어 씀(Y+a, H+o,W+a)
여기서 합성서 여호와가 탄생했다는 설 있음
- 그들은 강력한 유일신 사상(혹독한 nomad 생활의 생존조건 : 강력한 야훼공동체 구성)
- 그들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 : 디아스포라(diaspora: disperse 흩어지지만)의 시기가 있더라도 반드시 알리아(aliyha : 회복, 뭉침)의 시기가 온다고 믿음
- AD 70년(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 이스마엘)에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어 1948. 5 독립할 때까지 2000년이 걸리는 동안 그들의 무의식에 이런 믿음이 깔림
- 코란도 성서와 같이 감
- AD 72년에 전 세계로 흩어짐
° 동유럽과 러시아 방면
° 아랍권
- Anti Semitism(반 유태주의)을 가져온 이유 중
° 하나는 유태인 이외의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며 경계하고 적대시 하는 그들의 습성 때문임
° 로마 교황청 산하의 지방 영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돈을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한데 신성한 교회에서 돈을 직접 관리하기가 어려워 셈이 밝은 유태인에게 이를 맡김
° 금융 산업으로 확장되며 더욱 부를 축적
° 예수를 못박게 한 유대인이 더 잘사는 것에 대한 반감
° 유럽사회의 반유태주의 확산(예: 섹스피어의 베니스 상인 중 샤일록)
° 러시아에서 짜르 왕정시 20000명 대 학살(pogrom)
- 똑똑한 유럽사회를 중심으로 시오니즘 태동
°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됨
○ 아랍 이스라엘 분쟁
- 일명 중동전쟁이라고도 한다.
긴 역사적 배경과 복잡한 국제적 관계가 얽혀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지역에 끊임없는 긴장을 몰고 왔으며, 4차에 걸친 전쟁까지 겪어야 했던 이 중동분쟁은 아랍·이스라엘 양민족의 숙명적인 대립에서 유래한다.
즉, 기원전팔레스타인 땅에 건국한 유대인은 망국 후 유랑의 민족으로 전락하였으나 조상의 땅인 가나안의 언덕으로 돌아갈 것을 민족의 비원(悲願)으로 삼아 왔다.
이 '시오니즘(Zionism)'은 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재건하려는 정치운동으로 전환해 갔다.
한편 예루살렘은 636년 이슬람에게 공략되었고,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점거됨으로써 이슬람교도에게도 성지(聖地)가 되었다.
-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수행을 위해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독일측인 오스만 투르크의 후방교란을 위해 아랍인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양자에 대해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모순된 언질(아랍에 대해서는 맥마흔선언, 유대에 대해서는 밸푸어선언)을 주었던 것이 이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밸푸어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국가재건을 약속받은 유대인이 내주(來住)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고 있던 아랍인과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 맥마흔 후세인 협정
- 메카지역의 하심가문 후세인이 영국을 도와주면 아라비아 반도를 통합하여 후세인을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밀약
-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1916년에 이집트 주재(駐在) 영국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 맥마흔과 메카의 수호직(守護職) 샤리프 후사인 사이의 왕복서간(往復書簡)에 의한 협정.
- 그 중 1915년 10월 24일의 서간에서 맥마흔은 시리아 서부 이외의 아라비아인(人) 거주지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맥마흔선언).
이 약속을 계기로 하여 아라비아인은 독립운동에 돌입하였으나, 이 협정에는 경계(境界)에 관한 명확한 조문이 없고, 밸푸어선언과도 모순되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팔레스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를 낳는 계기
○ 발포어 선언
-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A.J.밸푸어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 선언
- 밸푸어는 그것을 시오니즘운동의 재정적인 후원자인 로스차일드경(卿)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 여기서 영국이 노린 것은, 유대인의 여론을 연합국측으로 끌어들이고 아울러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입식(入植)을 통하여 중동정책의 포석을 굳히려는 데 있었다.
이 선언은 1920년 산레모회의에서 영국의 정식 정책으로 채택되었으며, 1922년 국제연맹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결정하였을 때, 그 전문(前文)에 이 선언이 포함되었다.
○ 영국정부의 시오니즘 장소 알선
- 아프리카 우간다(너무 더움)
- 알젠틴
- 예루살렘
○ 하심가(Hāshimite)
- 아라비아의 聖市 메카의 지배계급인 크라이슈족(族)의 한 가계(家系)
- 시조 하심의 손자 압둘라(Abdullāh)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아버지
하심가는 메카의 크라이슈족 가운데서 가장 명예 있는 가계
○ 수에즈 전쟁
- 1956년 10월 29일, 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2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다.
- 이집트는 1952년 나세르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 장교단의 혁명으로 부패한 국왕체제가 붕괴, 공화제가 이행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찾아갔다.
한편 아스완댐 건설이라는 대역사를 추진하면서 미국과 서유럽의 재정 지원을 약속받아 경제적 활로도 되찾기 시작했다.
- 그리고 군사력 건설을 위해 미국과 서유럽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1950년 체결된 미국-영국-프랑스의 무기제한협정에 따라 무산되자 소련과 무기 구입 협정을 체결,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무기를 도입해 군사력도 급속히 강화해 나갔다.
- 나세르는 영국군을 수에즈 운하로부터 철수시키는 등 식민세력 축출에 성공, 아랍 민족주의를 고양함으로써 그 지도력을 인정받아 1956년 6월 22일 이집트 제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 그러나 나세르는 미소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등거리 외교로 줄타기를 하면서 국익을 추구해 나갔으나 미국이 이집트의 중립노선을 경계하면서 체코로부터의 무기도입을 제재하기 위해 나세르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7월, IMF가 약속한 아스완 댐 건설을 위한 2억 달러 차관을 취소하게 했다.
- 이에 나세르는 즉각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이스라엘 선박에 대해 수에즈 운하와 홍해에서 이스라엘 최남단 도시 에일라트에 이르는 아까바 만의 티란 해협 통과를 금지했다.
-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국제수로이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을 잇는 세계 최대의 해양 운하로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그동안 열강들의 세력 각축장이 돼 왔다
-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이 지역에 민감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관치 않고 이스라엘에 군사행동을 종용했다.
- 이들 국가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이스라엘은 1956년 10월 29일 ‘애꾸눈의 맹장’ 모세 다얀 장군의 ‘카레쉬 작전계획’에 따라 전격전을 감행, 시나이 반도의 요충지를 신속하게 장악해 버린다.
- 때를 같이해 영국과 프랑스도 전투기와 전폭기를 동원, 초기 공습을 통해 미그-15 전투기와 IL-28일류신 폭격기 등 이집트 공군기들을 대부분 지상에서 파괴했으며 2차 공습으로 카이로를 포함한 이집트군의 주요기지와 보급시설을 맹타했다. 그리고 공수부대를 투입 스에즈 운하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 이에 미국과 소련은 중동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 신장을 견제하기 위해 영·프의 군사 행동을 비난했다.
특히 소련은 강력한 비난 성명과 함께 이를 평화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고 경고하고 침략군에 대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공격 등 군사적 대응을 시사하면서 미국과 공동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에 응하지 않고 다만 소련이 중동에 군사력을 파견해도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돕지 않을 것이라고 시사했다.
- 이러한 미소의 압력으로 이스라엘과 영국·프랑스는 휴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개전 9일 만인 11월 6일 유엔의 중재를 받아들여 11월 3일 정전이 이뤄졌다.
그리고 유엔의 결의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군은 12월에 스에즈에서, 이스라엘군은 다음해 3월 시나이에서 완전 철수 했다.
- 제2차 중동 전쟁은 군사적 측면에서 이-영-프 3국의 일방적 승리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아랍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부작용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에 대한 기존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적잖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 반면 미국과 소련은 힘의 공백을 틈타 중동지역에 확실한 발판을 마련한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비롯해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아랍의 보수 세력과 손을 잡았고, 소련은 공화국인 아랍의 혁신 세력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이어 미국은 현대무기를 이스라엘에 공급했고 소련은 이집트·시리아·이라크 등에 대규모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미소 간에 또 다른 갈등이 증폭하기 시작한 것이다.
○ 캠프데이비드 협정
- 1978년9월 5일부터 9월 17일까지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단독평화교섭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열림
미국대통령지미 카터가 주선하여 안와르 사다트이집트대통령과 메나헴 베긴이스라엘총리를 초청하였다.
이 모임 결과 앞으로 두 나라간 회담을 지속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이 결과 두 나라는 1979년3월 26일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국가는 당시 이집트가 유일했다
- 43년 센스서 결과 제일 많은 종파가 대통령-이하 정부요직
- 팔레스타인 난민이 시아파와 손잡고 1988년 강성시아파 헤즈볼라 조직
- 레바논의 이슬람교 시아파(派) 교전단체이자 정당조직.
- 신(神)의 당(黨), 이슬람 지하드라고도 한다.
이란 정보기관의 배후 조정을 받는 4,000여 명의 대원을 거느린 중동 최대의 교전단체이면서 레바논의 정당조직이다.
호메이니의 이슬람 원리주의에 영향을 받아 1983년 이슬라믹 아말(Islamic Amal)과 다와 파티(Dawa Patty) 레바논 지구당을 통합하여 결성했고, 활동 본부는 레바논 동부쪽 비카에 있다.
이슬람 공동체로서 전 중동을 통일하기 위해 시아파 이슬람교 이데올로기와 상반되는 개인·국가·민족 등을 대상으로 테러도 한다.
- 주로 미국인과 미국 자산,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사람을 대상으로 테러를 자행한다.
1983년 10월 23일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 해병대사령부 건물 정면으로 헤즈볼라 자살 특공대가 약 1만 2000파운드의 폭약을 실은 벤츠 트럭을 몰고 돌진하여 미군 241명을 살상하였다.
1992년 3월 17일에는 유사한 방법으로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이스라엘 대사관을 침범하여 29명이 죽고 242명이 부상당하였다.
- 이후 이스라엘과 민간시설 및 민간인에 대해 공격하지 않기로 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2000년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한 뒤에는 12명의 의석을 지닌 정당으로 변신했다.
- 이란이 시아파의 종주국이므로 이란의 도움을 받음
○ 걸프전
-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탈(侵奪)이 계기가 되어, 1991년 1월 17일∼2월 28일, 미국·영국·프랑스 등 34개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상대로 이라크·쿠웨이트를 무대로 전개된 전쟁이다.
- 쿠웨이트가 원유시장에 물량을 과잉공급하여 유가를 하락시킴으로써 이라크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었다고 비난한 바 있는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 점령하고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속주(屬州)로 삼아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이라크의 침공 직후 쿠웨이트 왕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각국은 8월 2일부터 12개에 이르는 대 이라크 유엔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통해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라크군의 즉각적인 쿠웨이트 철수와 쿠웨이트 왕정복고, 대 이라크 무역제재 등의 강력한 이라크 응징을 결의하였다.
- 유엔안보이사회는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군하지 않을 경우 이라크에의 무력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를 전후하여 미국이 대 이라크전에 대비한 다국적군의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43만의 미군을 포함한 34개국의 다국적군 68만 명이 페르시아만 일대에 집결하였다.
이에 대해 이라크도 50여 만의 정규군과 50여 만의 예비군을 동원하고, 그들이 자랑하는 정예 공화국 수비대 15만을 쿠웨이트 및 이라크 남부 지역에 집중시켜 대치하였다.
- 미국은 이라크의 철수시한 이틀 뒤인 91년 1월 17일 대공습을 단행하여 이로부터 1개월간 10만 여 회에 걸친 공중폭격을 감행, 이라크의 주요시설을 거의 파괴하였으며, 2월 24일에는 전면 지상작전을 전개, 쿠웨이트로부터 이라크군을 축출한 뒤 지상전 개시 100시간 만인 2월 28일 전쟁종식을 선언했다.
이라크군은 42개 사단 중 41개 사단이 무력화되고 약 20만 명의 사망자를 낸 끝에 패퇴하였으며, 다국적군은 378명의 전사자를 냈다.
걸프전쟁의 결과 중동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하에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한국은 5억 달러의 지원금을 분담하고 군의료진 200명, 수송기 5대를 파견하여 34개 다국적군의 일원이 되었다.
- 이 전쟁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른 집단안보를 위한 조치로 취하여진 전쟁으로,
첫째 그동안 개발하여 실전에서 실험하지 못한 하이테크 병기의 실험장이었으며,
둘째 텔레비전이라는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여론(輿論)을 조작한 전쟁이었고,
셋째 산유(産油) 지역에서 산유국끼리 직접 정면대결한 전쟁이었고, 국가에 의한 인질전략을 사용하였다는 특징을 지닌 전쟁이었다.
○ 이스라엘은 모계사회
- 병역 기피율 가장 많은 나라(랍비가 되겠다는 것을 핑계로 대고 기피)
- 예루살렘 : 아마게돈(최후의 날)
○ 협상의 쟁점
- 정착촌 및 분리장벽 : 가자지구 완전 철수/ 웨스트뱅크 유지
분리장벽으로 인한 인권문제 및 국제사회 비난
- 동예루살렘 영유권 문제 : 시오니즘의 본산/ 예루살렘의 전략적 중요성
- 난민귀환 : 인구문제의 위협
이스라엘 680만(유태인 530만+아랍인 150만) : 팔레스타인난민 550만
점령지역 내 300만 요르단170만 시리아 40만 레바논4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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