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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

by 굼벵이(조용욱) 2014.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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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설 전통에서 보면 성장소설이다.

나이 어린 소녀가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정서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아이의 관점에서 맛깔나게 그린 작품이다.

나아가 당시에 유명했던 인종차별 사건(1955년 로자 팍스 사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흑인을 체포해 집단행동을 유발한 사건)을 주 테마로 이어갔다.

이러한 사건은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국민적 관심은 많은 독자층을 가져다준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이러한 사회적 관심이 이 소설을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하지 않았나 싶다.

대부분 불합리한 집단의식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터닝 포인트가 되어

새로운 합리적 집단의식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의 진화는 늘 이런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 것 같다.

중세의 신정이나 제정이 공화정이나 민주정으로 이어가는 맥락도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만들어 내는 지속적인 진화의 덕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나도 글을 쓰고 싶은데 그 글의 테마를

사회적 집단의식이 변화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싶다.

그런 요소들은 이 사회에 아직도 산재하고 있는 것 같다.

정치적 변혁기에 대부분의 신문지면을 장식하며 교묘하게

집단 의식화를 도모하고 있는 대상들에게서도 쉽게 그 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마녀사냥은 중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현대에도 자행되고 있다.

공공의 적을 만들어 함께 성토하면 집단의 결속이 강화된다는 얄팍한 심리학을 이용하는 것이다.

모방을 제1의 학습기제로 하고 있는 인간이 숙명적으로 지고가야 할

시지프스의 바위덩어리가 마녀사냥이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영 마음이 찜찜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작정하고 달려들다간 화형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난 그걸 그냥 편하게 시지프스의 바위덩어리라고 생각한다.

‘폭풍의 언덕’을 비롯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이 작품도 작가의 처녀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한다.

그녀가 이 작품을 능가할 소설을 쓸 자신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아마도 시대적으로 그런 엄청난 의식의 전환점을 찾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작품의 창작과 관련하여 하퍼 리는 언젠가

‘글을 쓴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다. ....

그러나 글을 쓰는 것만이 나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글을 쓰는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글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글은 곧 행복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스럽게 글을 쓰면 글이 왜곡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퍼 리는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홉 살 어린이의 눈으로 글을 썼는지도 모른다.

그런 글을 누가 유치하게 흠을 잡을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생각이 적으면 행복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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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잭! 어린애가 무엇을 묻거든 제발 직접 대답해줘.

대답을 지어내지 말고.

애들은 역시 애들이지만, 답을 회피하고 있는지는 어른들보다도 빨리 알아차리거든.

그리고 답을 회피하면 애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지.

 

욕은 모든 애들이 거쳐야 하는 단계야.(왜?)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면 욕은 자연히 사라지게 돼 있어.

 

(내 생각 : 애들만큼 모방을 잘하는 집단은 없다.

그래서 애들은 유행처럼 욕을 모방하고(자극적이므로)

욕을 함께 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형성한다.(또래집단)

욕은 어떻게 나왔을까?

나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Thanatos(죽음의 본능: 공격욕)에서

나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삶에의 의지가 강할수록 죽음의 본능도 강하다.

그래서 살려고 발버둥 칠수록 욕을 많이 하는 것 아닐까?

무조건적 모방을 통해 욕을 배우고는 나중에서야 그것의 본질을 이해하고는

이성적으로 욕을 멀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어느날 아빠가 오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네가 뒤뜰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될 거야. 

맞출 수만 있다면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부 레들리나 톰 로빈슨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앵무새와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나

아집(집단의식) 때문에 고통을 받고 죽어가기 때문이다.

(내 생각 : 특정 이념이나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의식이 마녀사냥을 자행하듯

흑인에 대한 잘못된 집단의식이 죄 없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사실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기도되고

대부분 모방이라는 학습 기제를 통해 만들어진다.)

 

제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재능을 자랑하지 않는 법이란다.

(내 생각 : 왜 그럴까? 인간의 우월욕망이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갔으니까.

사소한 다툼에서 국가 간 전쟁까지 모두 우월욕망에서 기인하니까)

 

다수결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양심이야.

(내 생각 : 양심은 일종의 내면적인 페르조나고 초자아니까

겉으로 표출되는 다수결과는 거리가 멀다)

 

광대들은 언제나 슬퍼. 그들을 보고 웃는 건 관객이란 말야.

그럼 난 새로운 종류의 광대가 될래.

무대 한가운데에 서서 관객들을 쳐다보고 웃을 거야.

 

스카웃, 우리가 궁극적으로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멋지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