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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어떻게 살 것인가

by 굼벵이(조용욱) 2015.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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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는 '향연'을 '심포지엄'이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지성의 축제'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장관설 대신 산파술을 택했습니다.

산파술은 상대방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대답하도록 함으로써

탁월함의 실체에 도달하게 하는 문답법입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아포리아를 극복할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 교육이었습니다.

교육은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찾는 것이지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저 낮은 곳,

어둡고 추운 동굴 속으로 내려가 그들의 고통과 명예를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깨달은 자가 먼저 전형이 되어 모범을 보이며 가르치고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합니다.

현자는 도피해선 안 된다는 거죠.

 

조성택

앞에는 길이 없습니다.

뒤돌아 우리가 걸어온 길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길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 사막입니다.

내가 걸어온 흔적은 남아있지만 나아갈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것인가의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훌륭함의 정의는 시대상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절제, 겸양, 배려, 관용 따위의 도덕률도 있지만 함께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분열을 조장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대부분 서양식 교육에 기인합니다.

논리를 위한 범주화가 이분법적 사고를 만들지요.

원효는 서로 다른 경전을 모두 최고라고 평했습니다.

그의 화쟁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皆是皆非를 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옳으면 너도 옳고 네가 그르면 나도 그르다는 것입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상황이 딱 이에 맞습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코끼리를 경험했으므로 다르지만 같은 코끼리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진리도 인정해야 하는 거죠. 그게 화쟁입니다.

논쟁은 내가 옳음을 입증하는 과정이지만 대화는 상대방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공감은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되어버리는 同體大悲의 정신입니다.

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분야가 시창작입니다.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가 되어보는 것입니다.

극기와 자기체념 없이 객관적 사물의 바른 인지는 존재할 수 없다.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기란 불가능하며

주관을 체념할 때 전체를 온전하게 그려내는 글쓰기가 가능합니다.

대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주관을 체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대화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내가 보기에 내 몸의 중심은 ‘아픈 곳’입니다.

발가락이 아프면 발가락이 중심이 되고, 귀가 아프면 귀가 중심이 됩니다.

인문학 아고라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중심은 바로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지요.

분쟁과 갈등이 있는 현장이 세계의 중심입니다.

인문학은 이런 세상을 이어줍니다.

 

석영중

톨스토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성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장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성찰과 학습을 통해 자기 완성에 도달하는 과정입니다.

노력에 의해서만 성장이 가능합니다.

성장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하지만 나는 너가 있음으로 존재합니다.

나 다음은 바로 나와 너의 관계, 나와 타자의 관계입니다.

성장은 목표가 아니고 과정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고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입니다.

몰입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소통을 하는 사람들은 가급적 말을 아낍니다.

대신 그들은 보거나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인간의 앞길에는 고뇌와 죽음과 망각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면 현재가 놀랄 만큼 풍요로워집니다.

오늘 밤까지 살아라, 동시에 영원히 살아라.

그가 이야기한 성장은 자기 의식에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자기 의식을 해방시키고 더 많은 타자와 세상과 공감하고 교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황현산

사람은 누구나 나라고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정하고 싶은 나가 바로 타자입니다.

시인들이 시를 쓸 때 대상을 미리 정해놓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장난치듯 쉽게 쓰고 그러다보니 진실이 드러났고 사람들이 쉽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부분을 건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제목을 고민합니다.

잘 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손쉬운 한 가지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특히 시를 읽으면 말귀가 밝아집니다.

관용의 정신이 생깁니다.

 

고은

내가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내 문학의 주제는 애도라고 생각합니다.

자크 데리다는 “애도는 인간의 최고의 가치”라고 했습니다.

김소월은 갓 서른 살이 되었을 때 평양에서 아편으로 자살했습니다.

윤동주도 이상도 20대에 요절했습니다.

그들이 살다 만 삶을 살아야 하기에 시를 많이 씁니다.

고급 지식인에게나 있던 마르크스 이데올로기가 갑자기 그것을 유화시킬 틈도 없이 농촌 자연부락 대중에게 덮쳐들었습니다.

삶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입니다.

내 존재는 관계의 결과물입니다.

술은 인간을 한 차원 고양시키기 위해 마시는 것입니다.

옛날 고도의 정신 도인들은 다 술에 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냥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정말로 술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 대상은 나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술을 좋아하면 술도 나를 좋아합니다.

우리네 모든 삶이 다 그렇습니다.

 

손봉호

결코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인간이 궁극으로 추구하는 것은 쾌락이며 행복은 최후의 목적입니다.

칼포퍼 역시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고통을 피하는게 훨씬 중요하다고 합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게 고통입니다.

줄어 들지 않는 고통은 아픈 곳 즉 병을 치료하라는 신호입니다.

인간은 주로 병든 동물이다.

하지만 왜 고통을 당하나에 대한 대답이 없습니다.

고통의 목적이 드러난다면 심지어 그 고통을 추구할 것입니다.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 없음이 인류에게 내린 저주입니다. (니체)

즉 인간에겐 고통의 의미가 없고 그것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저주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4/5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에겐 욕심이란 게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누군가가 고통을 받죠.

자연이 주는 고통보다 더 악독합니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는 도덕적이 되기 어렵습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존재하는 양심, 위선, 동정심 따위가 없기에 더욱 비도덕적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두 가지 이유는

1. 지나친 경쟁심입니다.

2. 불공정한 사회 때문입니다.

교통사고 입원률이 일본의 9.5배입니다.

고통을 나눌 친구가 단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필요한 것이 인문학입니다.

필요할 때 읽고 없으면 덮으면 됩니다.

악인들의 행운은 진짜 행운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모든 것을 투시하는 재판관의 눈 앞에서 행동하니 악행에 항거하고 덕을 쌓아라.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에 빠지려는 의지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말합니다.

고통이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포기해 버리고 손을 놓아버리려는 절망의 의지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는 거죠.

혹시 자녀 때문에 속썩는 분이 있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읽으십시오.

그는 17세에 미혼부가 되고 사이비 종교에 빠졌으며 온갖 사고를 쳤습니다.

 

해적이 이렇게 묻습니다.

혹시 대왕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장군들이 모두 고개를 숙인 것과 달리 해적 부하들은 먼저 죽겠다고 다투어 앞으로 나섰습니다.

정의가 없는 나라는 더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신의 나라만이 참다운 정의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행위를 할 때만 함께 사는 정의가 실현되는 신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랑 만이 극도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때로는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종교인보다 더 큰 희망과 사랑을 실천하기도 합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힘들고 악입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고통은 홀로 맞서야 하는 주관적 체험입니다.

그렇더라도 함께 걸어주십시오

 

차드 멩 탄

좌측 전두엽이 활성화될 수록 행복한 사람입니다.

고통과 번뇌로부터의 자유와 행복이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습니다.

분노, 질투, 증오, 탐욕, 공포, 두려움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행복을 경험합니다.

마음챙김이 중요합니다.

이는 주의력을 기울이는 일입니다.

특정한 방식과 목적을 갖고 비판 없이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판단을 배제한 채 정신을 집중하고 의식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10초동안 호흡에만 집중해 보세요.

이렇게 하면 바로 힘이 생깁니다.

체력이 강해지지요.

주의력 집중 훈련은 마음의 근육에 힘이 생기게 합니다.

두번째 감성지능 훈련은 자기인식입니다.

자기를 제대로 아는거죠.

자신의 감성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이해하면 이를 통해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번뇌를 극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이는 실존적 경험입니다.

행복, 분노, 슬픔 등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바로 나 자체입니다.

또다른 예로 정체성을 들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때론 고통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내 마음의 관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관찰자에게는 정체성이 없어요.

그냥 경험을 관찰할 뿐입니다.

그 순간 정체성이 초래한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바람직한 정신습관은 친절입니다.

타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행동을 통해 나 자신도 행복해지는 겁니다.

결국 사랑을 주고 받는데 익숙한 경영자들이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친절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고 자비는 다른 사람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자비심을 가졌을 때가 가장 행복한 마음상태입니다.

행복의 비법은

먼저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자기 인식능력을 발전시켜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친절과 자비를 베풀고 이를 습관화 하는 것입니다.

 

최인철

우리가 꿈꾸는 삶 중 하나는 죽는 순간까지 장난기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재미있어야 하는거죠.

두번째는 의미있게 살아야 하지요.

세번째는 몰입입니다.

먼저 마음이 바뀌고 다음에 행동이 바뀌지만 그 역도 성립합니다.

이로운 행동을 먼저 하면 선한 마음이 뒤따라 옵니다.

일상을 위한 일상에 의한 일상의 행복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육체에 필요한 3대 영양소는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이지만,

영혼에 필요한 3대 요소는 자유, 유능감, 관계입니다.

자유는 자율상태, 자발성의 상태입니다.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없으면 영혼은 시들어갑니다.

열등감은 불행을 초래합니다.

관계의 단절, 즉 소외는 우리 영혼을 시들게 합니다.

행복은 마음 속에 관심의 대상이 존재할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려면 호기심이 중요합니다.

행복한 삶의 두번째는 땀흘리며 운동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여행입니다.

옷을 사면 재화가 남지만 여행을 가면 경험이 남습니다.

 

용타

행복한 삶을 위한 다섯가지 원리는

1. 나 자신입니다.

2. 모두의 행복을 위해 사는겁니다.

3. 마음을 잘 닦아서 마음천국을 만드는 것입니다.

4. 주변의 모든 대상과 관계천국을 만드는 것입니다.

5. 결국 각자의 역할을 잘해서 세상천국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가치관형성입니다. 8정도

중 정견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대학의 격물치지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유가의 궁극적인 답으로써 깊게 궁구해 가는 바른 가치관을 정립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부모없이 태어날 수 없고 공기, 물, 중력 없이 살수 없으며 결국 우주와 연결되어있습니다.

우주는 동체 즉 한몸입니다.

석가모니는 이 이치를 깨닫고 나라는 집착을 내려놓고 해탈했습니다.

전체가 곧 나라는 거죠.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니 어디까지가 선이고 악이라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淸淨이라고 하는데 시비를 넘어서는 중도를 뜻합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전체가 부처가 아닌 것이 없으며 진리가 아닌 것이 없다고 했지요.

마침내 중중연기 서로 겹치고 겹치는 인연을 통한 관계맺기가 일어납니다.

눈을 감은 채 아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있어 보는 것입니다.

무념무상의 순간을 느껴보는 겁니다.

생각을 없애면 자아의 경계도 사라집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는 불교의 없다 철학을 더하면 우리는 하나의 비어있는 그릇이 됩니다.

역할에는 핵심소임이 있고 그것은 보시, 감사, 사과, 관용이라는 교류 4덕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한 원리를 정리하면

'나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 수심하여 마음천국을 이루고 화합하여 관계천국을 이루며, 작선하여 세상천국을 이루리라는 것입니다.

성공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