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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청춘의 독서(유시민)

by 굼벵이(조용욱) 2015.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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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세계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수수 엘리트의 역할은

세계사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

 

정치권력은 원래부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조직한 폭력이다.

 

혁명가 마르크스는 자기가 원하는 세상의 변화를 보고싶은 나머지 이론가 마르크스를 망가뜨렸고 이론가 마르크스는 결과적으로 대중을 속인 셈이다.

사회주의의 이상은 훌륭할지 몰라도 그 이상을 추종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은 졸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 자체만으로 나름 의미를 지닌다. 진화의 목표설정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맬더스는 자선을 사회악으로 규정했다.

출산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부귀한 상류계급의 도움으로 연연하는 ‘가치 없는 사람들’의 숫자만 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빈곤대중을 확산시켜 결국 영양실조 등 의미 없는 죽음만 양산할 뿐이다.

 

대부분의 구루들은 현실에서 철저히 실패한 지식인이었다.

공자도, 맹자도, 사마천도, 정약용도 그랬다.

기록을 남기는 자가 역사에서 승리한다는 격언이 있다.

그들은 모두 현실에서는 실패했지만 기록을 남겨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기록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인간은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인간이 이타적 행동을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유전적 근친성이다.

그리고 사회를 만들어 생활하는 과정에서 협동정신과 타인에 대한 배려,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 같은 사회적 재능을 진화시켰다.

이타적 행동이라는 인간의 사회적 재능은 먼저 유전적 근친성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표출되어 낮은 사람에게로 확장된다.

(인간이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도 사실은 이기적 유전자에 기인한다.

이타적 행동이 자기에게 더 이익이 되기 때문에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주면 내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원리와 같다.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하면 시너지가 창출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신은 이처럼 이타적 행동을 유도하는 완벽한 자연법칙을 운영하고 있다.)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다른 누군가와 싸우는 전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정체성의 닻을 내린다.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한다.

누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난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귀함을 지니고 있건만 생각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진정 귀한 것이 아니다.

조맹이 귀하게 해 준 것은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다.

 

삶보다 더 절실히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구차하게 삶을 얻으려 하지 않고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일이 있기에 환란을 피할 수 있어도 피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현자만이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가지고 있지만 현자는 이를 잃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남을 사랑해도 남이 나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인자한 마음이 넉넉했는지 되돌아보고

내가 남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것이며,

예로 사람을 대해도 나에게 답례를 하지 않으면 공경하는 마음이 충분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일을 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바르다면 온 천하사람이 다 내게로 귀의할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맹자는 항성이다.

항성은 행성이나 위성과 달리 스스로 빛난다.

 

전쟁의 천재였으나 정치의 둔재였던 한신, 그는 의리를 지키려 했던 마음 때문에 턱 밑까지 파고 든 음모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19세기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는 폭로와 논증을 넘어선 그 무엇이 있다.

나는 그것이 극도로 절제된 슬픔과 노여움의 미학이라고 본다.

그 미학은 푸쉬킨의 문장이 지닌 발랄함과 낙관,

톨스토이의 작품과 삶이 풍기는 농염한 휴머니즘 위에 서 있다.

 

도대체 인간의 이타주의와 도덕관념은 이디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이런 재능을 키워온 걸까?

다윈은 이것 역시 자연선택의 산물이라고 본다.

항상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많은 부족은 다른 부족에 비해 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선택이다.

 

인간은 모두가 이기적 동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타적 동물이다.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에 의한다면 이타적 행동도 이기적 원인에 기인한다.

결국 끝까지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의 이런 특성을 이용해 자연이 인간을 이타적이 되도록 만든 것이라는 나의 주장은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베블렌에 따르면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돈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기려고 하는 경쟁심 때문이다.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함으로써 만족을 얻는데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랑하려고 남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베블렌의 주장은 관찰의 산물이다.

현대의 유한계급은 금전적 경쟁, 과시적 소비, 과시적 여가에 몰두한다.

이들 비생산적 상류계급의 직업은 예나 지금이나 주로 정치, 전쟁, 종교의식, 그리고 스포츠와 관련되어 있다.

돌도끼 휘두르며 약탈하던 야만문화도 다 같은 금전적 겨룸의 하나다.

우월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유한계급에게는 가치가 가격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가격이 가치를 결정한다.

(우월욕망이 모든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는 헤겔의 분석이 내겐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

 

인간은 누구나 보수적이다.

보수성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처럼 보이지만 모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다.

유한계급의 규범과 생활양식은 모든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기준으로 통용된다.

하층계급은 유한계급을 타도하기 보다는 그 일원이 되기를 원하며 그들을 흉내 내려고 애쓴다.

사람은 학습하고 경험하면서 생각을 형성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생각이 그 다음의 삶을 규정하기도 한다.

베블렌은 다윈의 충실한 제자였다.

생물학자와 비슷한 방법으로 인간과 사회를 관찰하고 묘사했다.

 

헨리조지는 '진보와 빈곤'에서

자연이 또는 하느님이 준 토지를 특정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사회적 범죄라고 생각했다.

자연에 무제한적 토지상속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타적 소유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자연은 토지를 소유해서는 안 될 사람을 선별하여 자연스럽게 소유해야 할 사람에게 이양한다.

단지 시기적으로 시간이 좀 걸릴 뿐이다.

부자 삼대 못 간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천년 만년 이어지는 지주나 재벌은 없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지나 자본을 운영할 능력이 없는 지주나 재벌은 자연스레 교체되어질 수밖에 없다.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공동분배해도 언젠가는 지주 자질이 있는 사람에게 토지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부패한 민주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을 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이게 사실이라면 먼저 어떤 정부인지를 규명함으로써 지도자의 자질을 규정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런 정부를 누가 만들까?)

절망적인 빈곤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짐승 같은 노예로 만들어 고상한 천성을 얽어매고 섬세한 감성을 무디게 하며 그 고통 때문에 짐승도 마다할 짓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절망적인 빈곤의 상당부분은 자신이 스스로 불러들인 게 아닐까?)

토지 사유는 커다란 맷돌의 아랫돌이다.

물질적 진보는 윗돌이다.

노동계층은 증가하는 압력을 받으면서 둘 사이에서 갈리고 있다.

(나는 노동계층도 지극정성으로 업무에 몰두하면 신분상승을 포함하여 그 어느 것도 가능하도록 신이 설계를 해 놓았다고 본다.

헨리조지는 사회의 속성을 단편적으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는 사회구성원이 만들었고 구성원은 세습되는 게 아니고 자연스레 돌아간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말은 자연법칙을 의미하며 자연법칙의 기본은 지극정성 즉 사랑이다.

지극정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게 된다.

현세에서 안 되면 후세에서라도 받게 되는 게 자연법칙이다.)

 

역사란 무엇일까?

랑케는 역사의 진보나 발전을 인정하지 않았다.

발전하거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변화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진보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물질적 진보만 인정하고 정신적 진보는 인정하지 않았다.

공자나, 예수, 석가, 마호메트 등과 같은 현자가 2500년동안 왜 나오지 않는가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난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진보한다고 본다.

단지 속도가 느릴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의 진보는 2000년으로 측정되어질 수 없다.

우선 2000년 전쟁의 빈도수가 작아졌다.

이만해도 얼마나 큰 진보인가!

아울러 공자나, 예수, 석가모니, 마호메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들 모두 진보의 단서들이다.)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 불러줄 때만 말을 한다.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인가, 어떤 순서로 어떤 맥락에서 말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역사가인 것이다.

사실이라는 것은 자루와 같다.

그 속에 무엇을 넣어주지 않으면 사실은 의미가 없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에 그 상호작용은 언제나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끝없는 대화이다.

(역사는 '사실'이라는 객관적 실체를 '역사가'가 어떻게 주관적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다.

사마천의 사기도 결국은 역사에 관한 사마천의 생각을 담아낸 문서다.

역사교과서 국정문제도 이 두 가지를 구분해서 생각하면 쉽게 풀리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대의 역사는 현대사이며 한 역사가가 같은 책을 두 번 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