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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

by 굼벵이(조용욱) 2017.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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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를 괴롭게 한 것은 기만과 거짓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모두가 그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플 뿐이며

잠자코 치료를 받기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 말이다.  
누구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픈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픈 아이에게 그러하듯

자기를 동정해 주는 것이다.  
다독거리면서 안심시켜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삶에는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젊은이들은 형제자매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걸 더 선호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정 반대 선택을 한다.
나이가 들면서 더 적은 수의 사람을 만나고

가족이나 오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리고 미래보다 현재에 더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불행해 지기는 커녕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불안, 우울, 분노 등을 느끼는 경향도 더 적었다.
톨스토이는 생명의 덧없음과 씨름해야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사이에

얼마나 깊은 관점의 차이가 있는지를 본 것이다.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저 가능한 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을 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 연결고리를 유지하려 하는 것이다.


농장에서 그가 경험한 것은 어지러울 정도로 충만한 생명력이었다.
좋은 삶이란 독립성을 극대화한 삶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면 노인들은 사망률이 떨어진다.
어떤 대의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위해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걸 충성심이라고 한다.
인간에겐 충성심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이 충성심이 종교를 만들고 국가를 만든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안전하게 나와 우리를 보호해 준게 아닐까?

진화한 문화적 유전자(밈)가 만들어 낸 욕구가 아닐까?
우리는 모두 삶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을 넘어선 무언가에 헌신할 필요가 있다.

나도 전적으로 생명이 충만한 자연 안에서 자급자족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다.
즉 자연에 헌신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궁극적인 우리의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