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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길 위의 피아노 (한은진)

by 굼벵이(조용욱) 2019.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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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 넘어 까지 별을 노래하고 있다는 건 사치나 교만을 넘어 주책일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내 안의 푸른 별을 꺼내어 새까만 그믐 밤하늘에 매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우리 회사 한은진 차장이 처녀작 '길위의 피아노' 장편소설을 냈습니다.

격무 속에서 그걸 탄생시키기 위해 얼마나 마음 졸이며 힘들어 했을까...

해리포터의 조앤롤랑도 그렇지만 이웃 일본만 해도 직장생활 하다가 심지어 야쿠자 생활하다가 별처럼 떠오른 작가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녀는 혜성처럼 나타나 여성 특유의 섬세한 언어로 그녀 자신과 우리들의 삶을 해부했습니다.

나를 고독과 절망으로 몰았던 못된 친구의 모습을 나 자신 안에서 발견하면서 삶에 질문을 던집니다

처녀작이지만 그녀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메타포는 내 안에 깊이 감춰진 상상과 감성들을 꼼꼼하게 끌어냅니다.

한참 어린 후배지만 큰 스승 같은 한차장에게 존경의 마음이 우러납니다.‘


어제 제가 이 책을 소개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순식간에 100여명이 '좋아요'를 눌러주더군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회사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좋아요'를 눌러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안에 문화적 갭이 존재하는 거죠.

그걸 회사 밖의 사람들은 갑질문화라고 싸잡아 치부해버립니다. 

잘 나가는 사람들의 부족한 배려심에 대한 비아냥이지요.  

해는 반드시 지고 달도 차면 기웁니다. 

이 책의 주제가 바로 자기만 모르는 내 안에 살아 숨쉬는 교만입니다.   

한차장이 쏟아낸 주옥같은 글들을 음미해 보자


길 위의 피아노 한은진

 

​고층 빌딩 속 사람들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적당히 침묵하고 적당히 모른 척하고 적당히 눈웃음을 띄고 있다

질서 정연 한 모양새로 도무지 군더더기나 번거로움이란 게 없다

 

​사람들은 모두 주위의 풍경을 닮아가죠

정은의 목소리가 새하얀 꽃씨처럼 나풀거리다가 명훈의 눈 속으로 스몄다

 

​명훈과 결혼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아서 손을 내 밀면 그 조그만 손이 내 손을 놓지 않을 것 같아서...

 

​정은에게 있어서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혼자 웅얼거리지 않고 함께 말하기 위한 대상,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눈총을 받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한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 기능을 다했다

보송보송한 솜털 같은 풀꽃을 이층 철제 난간 밖으로 날리던 그들은 정은이 떠나온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연주하는 내내 그의 내면에서는 수많은 감정들이 오갔겠지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어

 

​눈앞에서 태양빛의 잔무늬가 아른 거였다

 

​오정희의 눈동자 안에서 죽은 꽃들과 죽어 가는 꽃들이 일렁거렸다

 

​배고픈 동자승이 두들기는 목탁 소리처럼 맑게 들리기도 한다

 

​목에 맺힌 땀이 또르르 굴러 가다가 갈색의 마른 나무 같은 몸통으로 다시 스며 들었다

 

​그들의 이기심은 저항 없는 도로 위에서 미끄러지듯 일직선으로 뻗어 갔다

초승달은 마천루 꼭대기에서 희미하게 꺼져 가는 조명인 듯 보였다

 

​고양이가 새끼를 배면 사람 아기처럼 운단다

고양이가 굶주린 배를 채우면 다시는 그 집 앞에서는 울지 않지

 

​석회석처럼 굳어버린 아집이 얼굴 곳곳에 드리워져있었다

정은은 김영태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하듯 ‘안녕 잘가요 아버지’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가 꽃이 되거든 꽃밭에 심어 줘

 

​김영태의 발길은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고요한 물길 같았다

바다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는 강물처럼 소리 없이 흘러갔다

 

​남자는 눈을 연신 깜빡이고 있어서 빨간불이 반짝 거리는 길쭉한 신호등을 연상케 했다

 

​신은 고통과 선물을 번갈아 던져 줄 뿐이다

 

​어떤 기억 한 줄기가 향로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연기처럼 살아났다

 

​자다가 초가을 낙엽을 맞으면 3년은 재수가 없다

 

​골목길과 큰길 사이에 있는 두 줄의 금처럼 정은과 아이들 사이에 있는 금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저, 말이야. 나는 나무들을 상상해.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 말이야.

그런 나무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거지.

나무는 자꾸만 끝없이 뻗어가고 나는 나뭇가지와 잎들에 둘러싸여서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처지 가 돼.

사람들이 나를 찾아다니지만 이미 내 몸은 나무처럼 서서히 굳어가고 있지.

그런데 그 느낌이 너무 부드럽고 황홀해서 원래 살던 세상은 차츰 잊어버리는 거야.

나는 나무와 한 몸이 되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라지다가 결국엔 기억의 흔적마저 없어져.

나는 그들에게 잊히고 나도 그들을 잊는 거지.

완벽하게 아주 완벽하게 말이지.

  

구름은 끊임없이 제 꼬리를 잘라 내며 먼 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검붉어진 하늘은 어느새 파란색의 제 빛깔로 되돌아왔다

 

툭 튀어나온 배위로 짤막하게 맨 넥타이가 달랑 거렸다

걸걸한 목소리로 연설을 느릿느릿 이어가는 모습은 붕어가 느리게 유영하며 입을 뻐끔 거리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눈물은 얼굴로 떨어지지 않고 눈 안으로 스며들었다

정은은 언제부터인가 눈물을 삼키는 법을 배웠다

 

​혼자서 밥을 먹으면 시간을 말들로 채우려고 애 쓸 필요가 없었다

 

​구름은 끊임없이 제 꼬리를 자르며 흘러갔다

너는 모르고 있구나

구름 속 알갱이들은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어

그것들은 멀리 떠나기도 전에 찬연한 빛에 닿기도 전에 떨어지거나 사라지고 말지

 

​귀공녀의 얼굴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정은의 눈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보랏빛 노을이 산 아래에서 거인의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오정희는 끊임없이 꿈을 꾸고 꿈은 끊임없이 깨졌고 끊임없이 절망했으며 또다시 끊임없이 꿈을 꾸었다

 

​오정희는 마치 가파른 산에 홀로 피어 있는 들꽃 같기도 했고 유리관에 덮여 있는 장미꽃 같기도 했다

오정희의 시선은 동네 사람들에게 가 닿지 않았다​

스카프 안 순백의 세상 속으로 맑은 햇살 한줌이 미끄러지듯 스며들었다

 

​오정희의 지루하고 끈질긴 기다림이 답답했다

김영태의 고지식한 선량함에도 숨이 막힐 듯 했다

김영태가 사람들에게 베푼 선의는 맑은 물줄기가 수챗구멍으로 흘러들어 가듯 흔적 없이 사라졌다

결국에는 사라지게 될 거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영태는 맑은 물을 수챗구멍 속으로 끊임없이 흘려보냈다

 

​희미해지는 등대 불빛이 강 위로 떠오르는 햇살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다

 

​산란하려고 올라온 어미 물고기들을 사람들이 먹었으니 바다가 화가 나서 사람들 데리고 간 거라고

 

​오정희가 막 터진 꽃봉오리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정희의 꽃밭 같은 것들이 들어서면 정은과 명훈 사이에는 꽃밭 크기만큼의 거리가 생기게 되리라는 것을 명훈이 몰랐을 리가 없다

 

​차가 빠르게 지나갈 때마다 벼들과 풀들이 등을 굽히며 울었다

 

​매미는 애벌레 적에 아주 행복했어요

천적도 거의 없었을 거고요

땅 속에서 사는 7년은 매미가 선택한 걸 거예요

어느 순간에는 매미가 지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죠.

 

​들에 피어 있는 꽃에 이름을 지어 주지 않으면 그냥 들꽃이듯이 별을 품지 않으면 자기별이 아니지

넌 항상 네별을 품고 있었다

 

​삶이란 어쩌면 패스트푸드처럼 짧고 토스트처럼 달콤한 게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별을 간직하기 마련이니까 그 별이 자신을 지켜 주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