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의식수준 17단계
인간의 의식수준은 총 17단계로 나뉠 수 있습니다. 이는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운동 역학의 원리를 이용하여 수백만 번의 임상실험을 거친 결과 수치로 밝혀낸 과학적이고도 구체적인 의식도표입니다. 각 단계의 의식수준은 그 수치에 상응하는 밝기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운동역학에 대한 부분은 뒤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의식수준의 각 단계의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지금쯤 눈치가 빠르신 분은 이미 ‘깨평기사이포자중용’ 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깨달음, 평화, 기쁨, 사랑 등 파워의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긍정적 의식수준의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항상 파워를 선택하라는 의미로 기억하기 쉽도록 만든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의식 수준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왔다갔다한다.”는 말처럼 우리의 의식수준은 하루에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 사람이 주로 머무는 의식수준이 있습니다. 여기서 의식수준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주로 머무는 의식의 홈베이스(Home base)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의식수준에 따라 유니넷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정보의 질과 양이 결정되기 때문에 나의 의식 수준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주로 어떤 의식수준을 쓰면서 살아왔는지 돌아보면서 각 단계를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에너지 수준 20룩스 : 수치심
“죽지 못해 산다.” 는 말이 있습니다. 수치심의 수준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지만 자살을 할 수도 없으니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식의 자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성폭행을 당함으로써 수치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심하게 모욕을 당해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거나 체면을 잃었을 때의 기억들을 갖고 있습니다.
수치심은 노이로제와 질병을 낳습니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수줍어하고 위축되어 있으며 내성적이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굴욕적인 감정을 느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수치심을 준 대상을 제거하고자 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정신병적인 범죄나 엽기적인 살인 등 잔인한 방법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어린이들은 동물을 학대하고 자기들끼리도 잔인하게 굴곤 합니다. 이들은 융통성 없는 완벽주의나 과격한 도덕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수치심을 타인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수많은 외침을 당해 왔습니다. 때로는 외세에 굴복하여 임금이 직접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는 수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민족이 수치심에 노출되면 전체 국민의 의식수준이 낮아지게 됩니다.
에너지 수준 30룩스 : 죄의식
죄의식은 자기연민이나 자기학대, 피해의식 등에서 생깁니다. 무의식적인 죄의식은 심인성 질병이나 잦은 사고, 자살 등을 유발하기 쉽습니다. 죄의식에 가득 찬 사람들은 종교나 사상단체의 선동자들에 의해 조종당하기 쉽습니다. ‘죄와 구원’을 파는 일부 종교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죄의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덮어씌우는 경향이 짙습니다.
자학증상이 심해지면 공공연한 동물학살로 잔인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의식은 분노를 일으키고, 살상은 이러한 분노의 표현이 됩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왕따’ 현상은 그 집단의 죄의식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학교 교육에서는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마치 죄인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공부 잘 하는 아이는 용서를 받고 그렇지 못한 아이는 좀더 심한 체벌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위권에 드는 몇몇 아이를 제외하고는 열등감과 죄의식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식은 술과 담배, 폭력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만들어 청소년 범죄를 낳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에너지 수준 50룩스 : 무기력
무기력은 빈곤, 절망, 자포자기로 이어집니다. 아무런 비전이나 희망도 없는 상태로, 세상과 미래가 황폐해 보입니다. 심각한 의욕 상실로 인해 외부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상황을 타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부랑자나 노약자들, 버림받은 아이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자극에도 무감각하며, 주어진 음식을 삼킬 만한 에너지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나이든 노인들의 체념상태이기도 하고, 만성 질병이나 심한 병으로 고생하며 절망하는 환자들의 수준이기도 합니다. 이 수준은 현실을 마주할 용기조차 갖기 힘든 희망의 포기상태입니다.
기업문화가 무기력상태에 빠져 있으면, 경기가 안 좋아지거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쉽게 절망하여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너지 수준 75룩스 : 슬픔
이 상태는 슬픔, 상실, 낙담의 수준입니다. 낙담하여 풀이 죽은 상태로, 우리는 때때로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직장을 잃거나 친구가 가족을 잃거나 도박 등으로 건강이나 돈을 잃었을 경우 우리는 이런 감정 상태에 빠집니다.
비탄에 빠진 사람은 만사를 슬픔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들의 눈에는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도 슬퍼 보이고, 세상살이도 슬퍼 보입니다. 잃은 것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으며, 상실감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생각이야말로 슬픔의 가장 큰 폐해입니다. 하나를 잃어 버려도 마치 전부를 잃어버린 양 상실감을 일반화시키고, 더 나아가 심각한 우울증과 죽음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패배의식에 젖거나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실패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슬픔은 인생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반면 ‘무기력’한 상태보다는 한결 많은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충격 받은 무기력증 환자가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회복의 조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단 울기 시작하면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음식을 먹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죽음의 에너지에서 벗어나 삶의 의욕을 느끼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너지 수준 100룩스 : 두려움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생존본능이기도 한 두려움은 때로 활동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한 반응인 것입니다. 적에 대한 두려움,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거절과 배신에 대한 두려움 등은 어느 단계까지는 인간이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할 동기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공포를 기반으로 해서 유지되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독재자가 국민을 통제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시장을 독점하려는 언론이나 광고업체들도 불안감을 조성하여 시장 점유율을 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포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위험천만한 곳이며,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공포심은 인간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습니다. 일단 공포에 사로잡히면 세상이 온통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공포는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진전되며 전염성이 강해 일시에 사회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은 개인의 성장을 제한하고 억압상태를 초래합니다. 공포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뚫고 일어서야 하겠지만, 공포심에 휩싸인 사람들에게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절실히 바랍니다. 두려움을 극복한 것으로 보이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희망하며, 그 지도자가 자신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기대합니다.
에너지 수준 125룩스 : 욕망
욕망의 수준에서는 더 많은 에너지가 발견됩니다. 특히 경제적인 욕망은 인간행위에 광범위한 동기를 부여해줍니다. 광고업자들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육감적인 유혹을 합니다. 욕망은 목표달성과 보상을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직위에 오르고, 더 큰 권력을 쥐도록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다그칩니다. 그러나 욕망에 집착하다 보면 인생 자체보다도 욕망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함으로써 오히려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망이란 채우고 채워도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채우고 나면 또 다른 것을 갈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백만장자들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욕망은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에게 갖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도록 만듭니다.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성취로 가는 출발선 위에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욕망은 더 높은 의식상태로 도약할 수 있는 도약대의 역할을 합니다.
에너지 수준 150룩스 : 분노
분노는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일 수도 있습니다. 분노가 살인이나 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불합리한 제도나 관습, 인간관계들을 개선하는 동력이 된 사례는 역사적으로 쉽사리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들은 분노를 유발하고, 그것이 사회구조 전반에 걸친 대변혁을 가져오는 사회운동으로 발전됩니다. 그러나 분노는 대개 복수심에 근거하고 있기에 흔히 폭발적이고 위험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대개 분노에 휩싸인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사소한 일에 과민하게 반응하고, 소송을 일삼고, 폭력을 휘두릅니다. 분노의 의식에 있는 사람은 분노를 일으킨 대상을 미워하고 공격하게 됩니다.
에너지 수준 175룩스 : 자존심
자존심은 한 국가의 군대를 통솔할 만한 충분한 에너지 수준입니다. 다른 부정적인 의식상태에 비하면 상당히 긍정적인 에너지라 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은 삶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는 버팀목 구실을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자존심은 좋은 덕목으로 평가받으며 사회적으로 권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은 의식수준의 분기점인 200룩스를 훨씬 밑도는 수준입니다. 자존심이 방어적이고 약점투성이인 것은, 자존심이란 외부조건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 조건이 없이는 언제라도 낮은 수준의 의식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은 특히 비난에 약해 언제든 수치심의 상태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자존심은 분열과 파벌주의를 초래하며, 그 결과 큰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군대는 지금도 (관념적인) 애국심이라는 자존심을 위해 서로를 죽이는 짓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종교, 전쟁, 정치적 테러리즘 등의 광적이고 무서운 역사는 자존심의 대가이고 사회 전체가 치러야 했던 벌이었습니다.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숨기려 들며, 그 결과 오만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존심은 진실한 성장과 명예를 안겨줄 수 있는 참된 내면의 힘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인 것입니다.
에너지 수준 200룩스(진실과 거짓의 경계점) : 용기
용기의 수준에서 내면의 참된 잠재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용기야말로 인생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구분하여 주는 분기점입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탐구하고 성취하고 결단을 내리며, 삶을 자기 발전을 위한 도전의 장으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이 흥미롭고,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용기는 새로운 것들을 시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전환시켜 줍니다. 용기의 수준에 이르면 사람들은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기회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집니다. 두려움과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노력합니다.
용기는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힘을 주며, 장애물이 나타나더라도 이를 하나의 자극제로 활용하여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 나가도록 도와줍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자기가 흡수하여 소모하는 에너지만큼 세상에 그 에너지를 되돌려 보냅니다. 반면,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하여 에너지를 흡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바로 이 수준에서 비로소 생산성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에너지 수준 250룩스 : 중립
중립의 수준이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인 것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편파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편파적인 태도는 모든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파악하며, 흑백, 선악 등 양극단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하기 마련이고, 분열과 반목을 낳게 마련입니다. 동양무술에서는 유연하지 않은 동작은 큰 약점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구부릴 줄 모르는 완고함은 그만큼 부러지기가 쉽습니다. 유연성이나 융통성은 중립의 단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립은 편파적 태도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려는 갈증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타인에 대하여 심판자적인 태도를 갖지 않습니다. 인생에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는 자세로 행위의 결과에 대해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자기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좌절하거나 분노하는 일도 없습니다.
중립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고, 실패했을 경우라도 자기신뢰를 잃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화하고, 정서가 안정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다는 충동도 느끼지 않습니다. 중립에 다다른 사람들은 자유를 아주 중시하므로, 그들을 규제하려는 일은 아주 어렵습니다.
에너지 수준 310룩스 : 자발성
중립의 단계는 직장의 일이 적절하게 굴러가는 수준이지만, 자발성의 단계는 주어진 과제가 훌륭히 이루어지고 성공의 결실을 맺는 수준입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성장이 빠르고, 마치 향상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자발성이란 인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을 극복하고 기꺼이 참여하려는 마음입니다.
이들은 크게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진실로 친절하게 대합니다. 기업에서 친절과 서비스 교육을 많이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친절은 자발성 이상의 의식수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하려 하고, 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밑바닥 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기꺼이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자존심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자신의 모자란 점을 인정하고, 남으로부터 배우고자 합니다. 어려움 앞에 굴복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통한 배움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적 성공이 저절로 따릅니다.
에너지 수준 350룩스 : 포용
부정적인 에너지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여기며 누군가를 원망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포용의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이 바로 삶의 원천이요, 창조자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의 근원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진정한 주인 의식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책임감이야말로 이 단계의 특징으로, 인생의 여러 외적인 힘에 대응하면서도 조화롭게 살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당신 안에 답이 있습니다.”라는 유답의 원리는 포용 이상의 의식수준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집니다.
포용은 무기력과는 다릅니다. 슬프고 기쁜 인생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세상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억지로 끌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해나 왜곡 없이 사물을 바라볼 수 있기에 경험의 의미를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포용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문제의 해결에 정열을 쏟습니다. 어려운 과제나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괴로워하거나 곤혹스러워하지 않습니다. 눈앞의 목표보다는 항상 궁극적인 목표를 추구합니다. 대립되는 의견이나 갈등에도 극단주의를 택하지 않으며, 타인도 자신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저급한 수준의 사람들이 융통성 없이 경직된 사고에 쉽게 사로잡히는 반면, 포용의 단계에서는 문제해결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형태의 해답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에너지 수준 400룩스 : 이성
이 상태에 이르면,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되며 지성과 이성이 삶의 전면에 떠오르게 됩니다. 광범위하고 복잡한 자료들을 처리하여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미묘한 관계와 점진적인 변화, 상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잘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알게 됩니다. 이성은 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성의 상태에서는 교육과 지식을 중요시하고 성취의 가장 큰 도구로 이해와 정보를 활용합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 위대한 지도자, 대법원 판사, 데카르트 등의 철학자들이 이 의식상태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성은 개념과 이론에 탐닉하여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있고, 세상사를 객관적인 관점과 주관적인 관점으로 나누어 파악하려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인과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다가가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철학과 이론들이 저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역설적으로 더 높은 의식세계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 기업에서 지식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자체에 매여 버리면 더 큰 직관과 지혜의 힘을 놓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너지 수준 500룩스(물질적,영적의 경계점) : 사랑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고 하면 성적 유혹과 탐닉, 소유욕 등으로 대변되는 에로티시즘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육체적인 매력이나 소유욕, 지배욕, 에로틱한 욕망 등의 배후에는 분노와 의존성이 내포되어 있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랑은 속절없이 무너지기가 쉽고, 한 순간에 질투와 증오로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감정은 흔히 말하는 ‘강력한 감정의 집중’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500룩스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변함이 없으며, 영속적인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가슴의 순수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내적인 힘입니다.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으며, 자신의 내부에서 근원을 찾기에 오르내림의 파동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고양시켜 주며, 그 동기의 순수성으로 인해 크나큰 성취를 이루게 해줍니다.
사랑은 유전자 속의 무한 잠재능력을 깨우는 뇌내 모르핀을 발생시킵니다. 이 상태에서는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 문제를 전체적으로 보고 핵심을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이성은 문제를 일일이 분석하여 따져 들어가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은 전체를 바라보며 문제를 풀어갑니다.
사랑은 신분이나 입장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집니다. 사랑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있을 수 없기에, 너와 나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사랑은 삶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여 삶을 힘차게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수준에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에너지 수준 540룩스 : 기쁨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의 기쁨이 점차 차오르게 됩니다. 이는 외부조건의 변화에서 오는 상대적인 기쁨이 아니라, 존재하는 매 순간마다 솟구치는 항구적인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부터는 영적 치유(Healing)가 일어납니다. 계속 되는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게 됩니다. 창조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고, 세상 만물은 서로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자비로우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때로 이들은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들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상태의 에너지 장의 발현이지 결코 어느 한 개인의 힘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어느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유익을 위해 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런 능력은 많이 하면 할수록 증폭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도 합니다.
사망선고를 받고도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그 경험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들 대부분은 540~600룩스의 에너지 수준을 경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너지 수준 600룩스 : 평화
이 단계는 ‘초월’ ‘자기실현’으로 표현됩니다. 진정한 평화의 상태에서 느껴지는 기쁨과 환희심은 모든 것이 하나라는 느낌에서 나옵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좋고 나쁨이 함께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특정한 관점이나 지각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진정한 한마음과 하나됨은 이 단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놀라운 영감과 계시를 체험하기도 하고, 생각이 끊어지면서 마음속에 절대적인 침묵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소위 불후의 대작이라고 불리는 예술작품들은 모두 이 상태에서 탄생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도 평화와 감동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시간과 공간이 멈춘 가운데 마치 슬로모션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돌아가고 있으며 무한한 가능성과 의미로 가득 찬 진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들은 대개 영적 지도자로 추대되거나 자신의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여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하기도 합니다. 강연을 통해서든, 이들이 보여주는 의식의 세계는 세기를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의식을 고양시켜 줍니다.
에너지 수준 700~1000룩스 : 깨달음
깨달음의 상태는 영적 완성의 단계로서,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세대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 영향을 주는 강력한 에너지 장을 형성합니다. 남과 분리된 ‘나’라는 개체의식이 사라지고, 우주의식, 진아眞我, 신성, 성통性通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도달할 수 있는 의식의 최고봉인 것입니다.
육신이란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내 몸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 단계의 의식은 완전한 하나됨이며, 더 이상 시공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들에게서는 인류에게 보내는 축복의 에너지가 발산됩니다. 예수나 부처 등 세상에 알려진 성인들은 모두 이런 상태의 의식을 가지신 분들입니다. (해탈 수준이 1,000룩스임)
'삶의 지혜를 찾아서 > 자기계발 산책(2011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칙중심의 리더십(스티븐 코비) (1) | 2020.05.13 |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프레임, 초판(최인철) (0) | 2020.05.13 |
머물지 말고 흘러라(안젤름 그륀) (0) | 2020.04.03 |
감성의 리더십2(2010,다니엘 골만 외 공저) (0) | 2020.04.02 |
내가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2010, 리처드 브랜슨) (0) | 2020.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