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5. 10(토)
오늘은 비번 놀토지만 어제 K처장과 한 이야기도 있고 해서 출근하였다.
(K처장은 전부터 노는 거 다 챙겨먹으려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상사가 원하면 일요일이든 휴가중이든 한밤중이든 언제든 함께해야 한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스스로 그런 삶을 살아왔고 덕분에 초스피드로 고속승진해 왔다.
그를 두번째 모시는 나는 그의 그런 경향성을 잘 읽는다.
그래서 그가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서 긴다.
어제 낌새를 눈치채고 K처장에게 “비번이지만 할 일도 있고 해서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었다.)
막 사무실에 들어서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내가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처장님이 우리 사무실로 와서는 나를 찾자 KM과장이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처장님께 가서 출근 인사를 드리고 산자부 보고서를 정리하여 우선 읽어보시라고 드렸다.
K처장은 점심시간에 다른 사람 몰래 L과장과 함께 나를 불러 일식집 ‘도다이’에서 점심을 사 주었다.
OOOO처 J씨와 노조 지부장 그리고 KKKK처 P과장도 함께 불렀다.
처장은 밥값을 자기가 내겠으니 누구든 일체 나서지 말라고 했다.
그의 성격이 워낙 유별나서 그럴 때 함부로 잘못 나섰다간 뼈도 못 추린다.
사무실로 들어와 전화로 K처장 연락을 받고 K처장과 Y부장이 함께 앉아 있는 처장실에 들어가 OO처 S과장이 가져온 임원 인선 관련 자료를 수정해서 드렸다.
Y는 그 서류의 결재라인에서 자기가 빠져있는 것을 보고는 무척 신경이 거슬린 듯하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결재서류를 보자고 해 모르는 척하고 결재란이 찍혀있는 서류는 보여주지 않고 첨부 보고서만 그에게 내주었다.
그의 마음이 무척 예민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해서는 안 될 일에 노심초사하며 속끓이는 것보다 자신이 나서서 스스로 교통정리를 해 주는 것이 한결 마음이 편할 텐데 그는 쓸데없는 것에 과욕을 부리고 있다.
직제상 내가 자기 밑에 있는 부하직원도 아닌데 내 상사처럼 결재 라인을 구성하려 하는 행위가 더욱 이상하지 아니한가!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고 빨리빨리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지만 나도 계속 참아내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언젠간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 의해서 바로 잡힐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음 편히 기회를 엿보고 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너무 서두르다가 잘못된 경우가 많았다.
이번 승진만 하더라도 아무리 앞이 안 보일 만큼 암담해도 조금만 더 참으며 세속적인 타협을 했었더라면 더 나았을 뻔했다.
(돌이켜보면 사실 내게 주어지는 고통의 총량은 같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길로 가면서 속을 끓이나 가지 않은 다른 길에서 마음 졸이나 결과적으로는 그 고통의 크기에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아마도 다른 길로 갔더라면 그나마 여기까지 와보지도 못한 채 어디선가 중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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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무렵쯤에 K처장은 다시 내 사무실에 나타나 퇴근하겠다면서 나가셨으므로 나도 부지런히 정리하고 잠실 테니스장에 나갔다.
요즈음 테니스가 잘 안 된다.
특히 Stroke 이 예전 같지 않고 이상하게 강약을 조절할 수가 없다.
뭔가 징크스가 생긴 모양이다.
집에 돌아와 모처럼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아내는 반찬으로 야채전과 오징어 볶음을 준비해 놓았다.
냉장고에서 맥주까지 꺼내어 잔에 따라주면서 화해의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보냈다.
집사람의 시위성 침묵은 아무리 짧아도 한 달 이상 간다.
스스로 '미련맞은 여편네'를 자칭하며 그렇게 미련을 떨 때면 진짜 곰같다.
나도 똑같아서 한번 틀어지면 서로 말 안하고 지내는 기간이 두세달은 족히 되지 않나 싶다.
하나포스에서 영화를 한 편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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