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3

20030821 전무님의 한풀이

by 굼벵이(조용욱) 2022. 2. 24.
728x90

2003. 8. 21()

아침 꼭두새벽부터 처장님이 호출했다.

다면평가 개선방안과 관련하여 전무님은 일반인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그럴듯한 작명을 요구했었다.

나는 사실 그걸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었는데 처장님은 밤새 고민한 모양이다.

그러면서 내게 뭐 생각나는 게 있냐고 묻기에 아직 없다고 하였더니 백두대간이라고 붙이면 어떻겠냐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 거창해 지나친 과대포장 같았는데 암튼 그럴듯한 이유를 달며 그걸 제안했다.

나는 즉석에서 '環狀型 다면평가'가 어떻겠냐고 물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전력선을 의미하여 회사의 이미지도 연상되지만 모든 사람이 고리처럼 연결되어 서로 평가하는 다면평가의 본래적 의미를 표현할 수 있어 내가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처장님은 두 개를 모두 정리해서 전무님께 가져가라고 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다시 한번 다면평가 보고서를 정리한 후 잠시 시간 여유가 되어 월간 인사관리 책자를 보았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처장님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안 봐도 뭔가 급한 오더를 받아 온 게 뻔하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이 인사기록표 상의 입사구분란을 폐지하라는 주문을 했다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잠시 스쳐 가는 과객들의 횡포로 회사가 멍든다.

한번 엎질러진 물은 절대 다시 담을 수 없다.

그동안 수 많은 사장들이 오가며 경영권을 내세워 제멋대로 제도를 바꾸어 제도가 누더기 걸레 조각이 되었다.

어느 조직이나 유지되어야 할 일관성이 필요하다.

그래야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 정렬이 이루어지고 예측 가능한 경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평균 2년의 임기로 사장이 바뀌는데 제멋대로 제도를 바꾸면 회사는 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다 좌초한다.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서 지시했으면 좋겠다.

원칙과 기준 없이 제멋대로 이루어지는 요구나 지시는 경영이 아니라 깡패짓과 진배없다.

명백하게 대졸과 고졸수준으로 구분해서 선발하고 처우하면서 그 기록을 없애라고 하는 것은 대졸에 대한 역차별일 수 있다.

공정과 상식은 먼저 우리가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고 아울러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인정해 주는 데에서 출발한다.

1140분 쯤 오더를 받아 5분간의 꿀 같은 오침도 생략한 채 보고서를 만들어 오후 2시 쯤 처장님께 올렸다.

한두 줄 수정과정을 거쳐 전무님께 갔다.

전무님은 당신 자신이 고졸수준 입사자여서 한술 더 떠 그동안 쌓여온 한을 이번 기회에 한번 제대로 풀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인사기록 카드는 물론 인사 전산까지 모두 고치고 싶어 했고 승진심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승진심사평가표까지 입사구분란을 없애라는 주문을 했다.

곧바로 돌아와 김처장님께 전무님 주문사항을 보고하니 김처장도 처음에는 당혹해 하다가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며 생각을 바꾸었다.

보고서를 수정하여 전무님께 가니 전무님이 그걸 들고 금방 사장님께 가 순식간에 결재를 받아오셨다.

전무님 기분이 엄청 up되어 있는 듯하다.

나는 곧바로 다면평가 보고서를 내밀었다.

순간적 기회 포착이 중요하다.

기분이 좋을 때는 누구나 부정적 사고 대신 긍정적 사고로 전환된다.

전무님은 어제의 지시사항이 모두 반영된 것에 흡족해하며 흔쾌히 사인했다.

 

기록카드 양식 개선 시행과 관련하여 사업소에 바로 공문을 내려보내야 한다.

K에게 기안을 지시했더니 10분이면 하는 기안을 더듬거리며 계속 헤매고 있다.

4번이나 재작성 지시를 했다.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될 것을 이리저리 엉뚱하게 편집하는 등 쓸데없는 짓을 하는 바람에 결국 내가 허둥지둥 다시 수정하고 처장 전무 쫓아다니며 퇴근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결재를 내고 사업소에 공문을 발송했다.

정말 답답한 친구다.

그동안 그런 친구와 아무런 마찰 없이 함께 일했던 부장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니 그에게 일을 맡길 리가 만무했고 결국 그는 그 오랜 세월을 내 그늘 밑에서 기생하며 지낸 거다.

암튼 그런 그지만 내가 어떻게든 돌봐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복덕방 송순옥씨에게 2000만원을 송금했다.

그녀는 나를 믿고 전세금 중 2000만원을 자기 돈으로 먼저 임대인에게 선납해 주었었다.

어제 받은 잔금으로 그녀의 선납금을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