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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상처로 숨쉬는 법(김진영) - 제18강. 상처와 허파

by 굼벵이(조용욱) 2022.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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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로 숨쉬는 법 (김진영) 제 18강 상처와 허파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아름다운 글을 쓴다는 것이고 아름다운 글은 아름다운 사유에서 나온다
​아름다운 사유를 한다는것은 궁극적으로 생을 사랑하려는 소망에서 나오는 일이다
​아도르노는 사랑이 불가능한 세상에서 생을 사랑하기 위해 글을 잘 쓰려고 하면 무엇보다 허위와 허영으로 생을 사랑하는것에 대한 비판적 작업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생은 아름답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생을 찬양하고 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생 속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여전히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허위와 허영으로서의 아름다운 글쓰기라는 거예요
이것은 생을 찬양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생을 경멸 하거나 절망 하고 있다는 거죠
​생에 대해 좌절 했지만 생의 불가능성이나 어두움과 맞설 힘이 없는 사람들은 도피처를 마련해 내는데 작가의 경우 오히려 생을 찬양하고 아름답게 보려 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글쓰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죠
​보편적 사실과 전혀 다른 예술적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는 거예요
그것을 아도르노나 니체는 원한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원한을 가진 사람들은 적을 확실히 알고 있죠
때문에 원한을 품게 돼요
동시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은 비겁해요
왜냐하면 그 적과 맞서 싸울 용기가 없습니다
​생을 가장 미워하고 절망 하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생을 찬양하고 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사람이 될수도 있다는 거예요
자신을 대가라고 믿어 버리고 나면 자기가 하는 말들에 대해서 스스로 신뢰를 가지게 되고 그것이 어느 사이엔가 권력으로 작동하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자기가 주변부에 있을때는 끊임없이 무엇이 잘못됐다 얘기하고 문제라고 얘기 하는데 성공을 하거나 어떤 지위에 오르면 자기가 비판했던 바로 그 말들을 또 쓰기 시작 한다는 거예요 허영으로서의 글쓰기의 숨은 내막입니다
아도르노에게 글을 잘 쓴다는것은 다름 아닌 생에 대한 허위적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에요
세상에 들어 있는 비천하고 병들고 더럽고 버려진 것들에 대해 주목 하는 일이죠
​그 고통은 언제나 당사자에게는 극한치에요
만일 그러한 고통을 우리가 극한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일이 정당한가라는 문제와 만나게 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고통을 표현하는 일이고 객관화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생의 근원적인 힘은 오히려 더러운 것들 추한 것들 고통받는 것들 속에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추하고 더럽고 병든 것 자체가 선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들 자체가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는 삶의 아름다움일까요
그런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추하고 병들고 버려진 것들에게 또 한번 폭력을 가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것도 상처를 받고 폭력을 당하고 억눌리면 기형화되고 왜곡되죠
​생도 억압을 당하고 타격을 당하고 소외를 당하게 되면 왜곡되고 기형화 되고 얼핏 보기에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의 모양을 지니게 된다는 거죠
​글을 잘 쓴다는것은 뭘까요
삭제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길이는 아무래도 좋다
분량이 너무 적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유치하다
일단 써졌으니까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몇몇 문장이 동일한 생각을 반복적으로 변주 하는 건 생각이 또렷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최상의 정삭화를 선택해야 하고 그것으로 계속 작업 해 가야한다
구성상 필요하다면 버리기 아까운 사유들조차 버려야 한다
그리 끝났을 때 전체 구성을 완벽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그렇게 버려진 생각들이다
식탁에서처럼 마지막 한입은 먹지 말아야 하며 마지막 술잔은 바닥까지 마시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하면 그만 바닥을 보이고 만다
​글을 잘 쓴다는것은 무엇을 쓰는가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다는식으로 아도르노가 얘기 하죠
​글 쓰는 사람은 아름다운 표현과 사실적인 표현의 구별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말 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품위있게 작업된 텍스트는 거미줄과 같다
촘촘하고 집중되어 있으며 투명하고 잘짜여져 있으며 견고하다
이는 날고 기는 것들 모두를 자신 안으로 끌어 챈다
​현실 자체가 언제나 앞서야 된다는 것이죠 그것을 객체의 우위라고 합니다
​이 현실 자체는 그 대상에게 끊임없이 가까이 가는 작업이 필요해요
바로 그 작업에 합리적인 것과 미메시스적인 것이 함께 가동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유를 하게 되면 그 사유는 늘 중심을 가져요
사유는 목적성을 지니기 때문에 그 목적성이 중요한 것이 되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죠
​우리의 사유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앞서면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부수적인 작업이 이뤄지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권력적 사유에요
이 권력은 내 의도로부터 나오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의도를 드러내는 글쓰기가 성공 한다면 그 글은 어떤 의미에서의 성공이죠?
나의 성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의도를 분명하게 성공적으로 썼다는 것과 다루어지는 사안 자체가 정확하게 재현되었느냐는 별개의 문제예요
내 의도를 분명하게 썼다는것은 자기 만족을 줄수는 있지만 그 글은 객관적 사실과 전혀 무관한 것이 될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 글은 글 쓰는 사람을 위해서 써진 글이지 글이 되어야 하는 대상을 위해서 써진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시련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
​권력적 글쓰기 자기 위주의 글쓰기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거죠
​별자리를 그리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 만이 아니라 이 흩어진 별들이 연결되고 싶어 하는 어떤 조형성을 동시에 발견해 내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죠
단어는 도구가 아니라 단어 자체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단어의 욕망과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의도에 의하면 a라는 단어가 b와 연결되어야 하지만 a라는 단어는 어쩌면 f로 가고 싶은지 몰라요
​잘 쓴 글은 아름다운 글이고 아름다운 글은 어떻게 사유하는가 라는 문제와 만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어떻게 생을 사랑할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허위적이고 허영적이고 위선적으로 얘기하는 삶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운것이 되어야 함에도 그 권리를 박탈 당했기 때문에 추하게 되어 버린 것들에게 생의 권리를 되돌려 주는 일입니다
​생을 사랑한다는것은 왜곡된 생을 그 생이 되고자 했던 바로 그 모습으로 되돌려 주는 일입니다
​아도르노는 상처 없이 온전한 삶에 대한 비유가 있다면 그건 죽은 자들 뿐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아름다운 삶의 모델을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은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만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거울 그림을 보는 것처럼 거꾸로만 상상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개인도 몰락하지만 시대도 몰락해요
정치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몰락이에요
파스칼이 얘기해요
세월 앞에서 인간 사라는것은 생의 본질적 비참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대체 상처가 허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데트를 알아보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데뜨라는 보잘것 없는 한 여자를, 살기 위해서 온갖 몸부림을 쳐야 하는 존재를, 죽음의 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마지막 단계에서 스완에게, 우리가 스완이라면 우리에게, 나를 좀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이 오데트를 알아보느냐 못 알아보는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나의 상처로부터 해방이 되려면 이 사회적인 상처를 볼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죠
객관적 권력이 만들어 내고 있는 상처를 통해 그 객관적 권력을 알아봐야 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나의 상처도 치유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객관적 권력에 대해 성찰 하지 않고 사회적인 상처에 민감 하지 않으면서 내 상처를 치료할 방법을 찾는다면 아무리 찾아봐도 상처는 절대로 허파가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