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교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명료합니다.
‘오직 자신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인문학의 근본 목적이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여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죠.
우리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각종 원칙이나 제도, 이념, 신념, 가치관 따위로 덧칠해져 있어요.
自我(Ego)가 페르조나라고 하는 가면 안에서 살아가는 거죠.
그걸 깨고 眞我(Self)로 살라는 주문입니다.
진아의 실체는 덧칠하지 않은 순수욕망이라고 합니다.
그게 동양에선 德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 이 부분에 조금 생각이 달라요.
이성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은 순수욕망이 과연 존재할까요?
생각 없이 툭 튀어나오는 그런 순수욕망이 있을까요?
의식이 인지하지 못하기에 프로이트는 그걸 무의식의 잣대로 설명했을까요?
그런 순수욕망도 혹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는 과정에서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무위라는 개념은 인위적인 것이 없다는 것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마음 가운데서 무위를 찾기가 어렵지 않나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잖아요.
혹 아는 만큼 욕망하지 않을까요?
진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결핍된 자아의 일면 아닐까요?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이외에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보는 눈은 분명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 관점에서 타인이나 사물을 바라봐서는 안 되고 존재양식(to be)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보려는 노력은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최교수님 책 중 밑줄 친 내용을 요약 정리했으니 참고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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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움직이는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잡스가 이룩한 성공이 아닙니다. 잡스는 인간이 변화해 가는 맥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고 있었던 것과 또 그것을 집요하게 ‘관찰’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한국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담론은 주도적인 것이든 아니면 저항적인 것이든 간에 모두 큰 틀에서 외부에서 들여온 것들임은 틀림없습니다.
인문학의 목적은 인문적 통찰력을(더듬이) 기르는 것입니다.
인문적 통찰은 대답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질문하는 데서 비로소 열립니다.
서양사상의 원천은 사유지만 동양사상의 원천은 구체적 세계에 대한 경험입니다.
노자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대립되는 두 계열의 관계로 돼 있다고 보았습니다.
서양역사에서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최초의 선언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입니다. 중세에는 인간이 행사하는 힘이 신의 은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베이컨이 신의 은총과 상관없이 아는 것에서 온다고 한 것입니다. 거기서 세계관이 갈라지고 시대가 구분되는 것이지요.
자기에게 있는 이념, 신념, 그리고 가치관 등이 자기의 독립성보다 강하여 자기를 지배하면 지배할수록 인문적 통찰은 불가능하고 더듬이가 없어져요.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을 뚫고 이 세계에 자기 스스로 우뚝 서는 일, 이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을 얻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신념과 이념과 가치관은 기본적으로 집단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것’이지 나만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나에게만 고유하게 있는 어떤 것 나를 나이게 하는 어떤 것은 바로 나에게서만 비밀스럽게 확인되는 욕망이지요.
철학의 출발 자체가 믿음의 체계인 신화로부터 벗어나 시작되었습니다.
르네상스의 인문학도 중세의 신의 세계에서 인간이 고개를 쳐들고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입니다.
자신에 대한 무한애정, 무한 신뢰 이것이 바로 행복의 시작입니다.
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립적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예라고 하는 특정 교화체계를 저기 높은 곳에 걸어두고 백성들을 모두 거기에 통합시키려고 하지요.
노자는 비록 선한 내용일지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하는 장치일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이 마음껏 발휘되게 해야 한다고 권유했습니다.
개별적 존재들이 보편이라는 모자를 쓴 특정 이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로지 각자의 자발적 생명력에만 의지해서 약동하는 상태를 노자는 무위라고 표현합니다(인위적인 것이 없음)
멋대로 하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
멋대로 하는 힘은 각자의 욕망에서 나옵니다.
小國寡民 - 노자의 기획은 조직이나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삶의 주도권을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
지식은 사건이 일어나던 번잡한 시간에는 가만히 있다가 사건이 마무리되면 그 때서야 활동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지식인의 소극성을 폭로하는 것이죠. 사건에 대한 이해, 분석, 의미부여의 결과물 따위가 지식이고 이론이라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건을 해석하여 표현해 낸 것이지 사건 자체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식은 사건이 남긴 똥입니다. 지식은 통찰을 위한 거름입니다.
德은 인간 본래의 마음입니다. 두인변은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直心은 아무런 고려도 없이 특 튀어나온 마음이지요. 인간은 화장기 없는 맨얼굴이라야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덕은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탱해 주는 무엇이라기보다는 활동이자 향기이자 동력입니다. 덕이라는 개념은 출현할 때부터 신의 뜻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주나라 탄생 합리화)
사실 덕은 이성보다 욕망 쪽에 더 가까워요. 욕망을 느낄 때만 온전히 자기에요.
상상력 발동의 핵심요인은 무엇입니까? 욕망입니다.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욕망이 움직여야 가능합니다.
결국 진짜 멘토는 내 안에 있는 나일 수밖에 없어요. 욕망으로 존재하는 내가 진짜 나의 멘토란 말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자기 스스로 독립적 주체가 되어 이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 있다면 이는 대단한 내공입니다. 진정한 앎에 도달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내용을 언어화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죠. 언어화한다는 것은 명제화, 체계화한다는 말이에요. 개념화하는 거죠.
훌륭하다고 숭앙받던 사람들이 어디서 무너집니까? 다 일상에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인간은 구체적 일상을 같이 영위하는 가족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인간 성숙의 척도는 높고 크고 거대한 곳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일상에서 확인되는 것이 더 치명적이죠.
자기가 자기로 존재할 때 자기 눈에 일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이념을 사유의 원천으로 하지 않고 구체적 세계를 사유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거예요. 밥이나 설거지가 함축하는 의미가 뭐겠어요. 바로 구체적인 일상세계에요.
무소유도 세계를 관념화 하여 붙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관념체계로 가져와 소유하며 고정시키지 말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놓고 보는 일 그것이 존재적 태도입니다. (소유냐 존재냐)
덕이 있는 삶이랄지, 욕망이 주인인 삶, 부처님의 해탈도, 장자의 소요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모든 깨달음의 핵심은 사실 명사로 굳어있는 자신을 동사적 상태로 되돌리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吾喪我 자기 자신을 장례지낸다. 기존의 자기와 결별하지 않고는 절대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없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我는 가치와 이념에 의해 고착되고 굳어져 있는 경색된 기존의 자아입니다.(페르조나)
철학은 경이로부터 시작된다. 익숙했던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죠.
개별적 존재가 보편적 존재한테 우선권을 양보하면 안 되지요.
그럼 자기는 언제 존재합니까? 질문할 때 존재합니다. 질문 하려면 일단 문제가 있어야 하고 문제는 호기심에서 생겨납니다. 호기심은 욕망이 만들어냅니다.
글을 쓰면서 사람들은 자신과 대면합니다. 운동 그리고 낭송이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좋은 장치입니다. 모두 육체성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신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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