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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죽음이란 무엇인가? (셀리 케이건)

by 굼벵이(조용욱) 20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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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셀리 케이건)

 

인간이 믿음과 욕망을 갖고 있으며 생각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하는

일련의 긴밀한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를 설명하기 위해 영혼의 존재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있다는 환상속에서 살아가는 물리적 존재일 따름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그래서 영혼의 존재가 의심받는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양립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철학자도 있다.

인간이 결정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다소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양립주의라고 부른다.

그래서 영혼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악기를 망가뜨려 화음을 파괴할 수 있듯이 육체를 망가뜨려 정신을 파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갑자기 살을 많이 뺀 여성에게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네? 라고 말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느낌도 다르다.

그녀는 서로 다른 사람일까? 그냥 살을 많이 뺀 동일한 사람일까?

 

인격이란 계속해서 변하는 존재다.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 한 중복성과 연속성의 익숙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한

동일한 인격은 얼마든지 그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

 

인간은 늘 현재적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지만 그 타인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 대한 과거 기억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만나는 지인은 언제나 과거형 인간이다.

자신의 머리 속에 각인된 과거형 인간만 존재한다.

하지만 지인인 타인도 현재형과 과거형은 엄격히 다른 인간이다.

시점이 다르다보니 상대방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강하면 강할수록 오해의 강도가 강해진다.

가족을 포함하여 친구나 친한 사람들이 서로 갈등을 빚고 싸우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그래서 가족이 더욱 오해의 골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본다.

새롭게 처음 만난 사이라면 상대방에 대한 과거 기억이 없기에

서로 현재형으로 교감함으로 오해의 골이 생길 여지가 없다.

우리가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새로운 것이 늘 멋지고 아름다워보이는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철학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정체성의 본질은 나와 관련된 특정한 사실 또는

나라고 하는 인간의 다양한 단계들 사이의 관계에만 의존한다.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적 상황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새로운 믿음을 갖는 순간 기존의 나는 사라져야할 존재다.

20분 전에 갖고 있었던 기억을 잃어버리는 순간 나는 이미 죽은 몸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

 

죽음이라는 것에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은 없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치명적인 병에 걸렸을 때 그렇게 충격적으로 절망할까?

 

인간은 홀로 죽는다기보다는 함께 살아가고 홀로 죽는 법을 배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결국은 혼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는 사람은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홀로 죽는다는 표현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모두 고독과 유사한 심리상태를 겪게 된다는 말이다.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며 죽는다.

 

결국은 홀로 외로움과 소외감 속에서 죽어간다는 것을 인식하고

미리 여러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외로움 소외감이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도록 강도 높은 고독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스스로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인간은 본질적으로 배은망덕하다.

친구란 무엇인가?

즐거움을 함께 추구하는 사람이다.

함께 있을 때 즐거움의 시너지가 창출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결국 친구는 즐거울 때만 찾게 되어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생존과 관련된 것으로 보여 진다.

당이 없으면 인간의 생존이 곤란하기에 선험적으로 당을 원하도록

(그래서 인간이 사탕이나 초컬릿을 좋아한다) 인간의 DNA에 박아놓듯이

친구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줌으로써

늘 함께 모이도록하여 주변 동물이나 외침으로부터 함께 대처하도록 한 것 아닐까?

결국 친구는 본질적으로 잘나갈 때, 좋을 때 친구지 불행하고 힘들 때 친구는 아니다.

 

삶이 축복일까 역경일까?

서양사상은 축복이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불교사상은 삶이 역경임을 강조한다.

역경의 원인은 오욕(재,색,식,수면,명예) 칠정(희노애락애오욕)에 대한 집착에 있기에

이를 버리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라 한다.

오욕칠정은 어디서 왔을까?

결국 생존이다.

그게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에 선험적으로 부여한 인간의 본질이다.

하지만 수 만 년 살아오면서 이젠 더 이상 그게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역경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니 그걸 더 이상 고집하지 말란 이야기다.

서양사상이든 동양사상이든 한 쪽만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인생은 즐거움과 고통의 사이클이 반복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역전드라마다.

그래서 자살도 어려운거다.

 

뭔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반드시 나쁜 것이어야 하고

그 나쁜 일이 일어날 확률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야 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감정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뿐이다.

 

삶은 좋은 것이며 그래서 그 상실은 나쁜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관점은 서양식 사고방식이다.

삶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며 고통, 질병, 아픔이다.

이런 상실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좋은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동양불교는 강조한다.

실재하지 않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한다.

자아의 관점에서 죽음은 두렵다.

하지만 자아가 없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우리의 삶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이라는 기계다.

생존을 위한 DNA로 구성된 기계다.

그 안에 다양한 본질적 속성이 들어있다.

그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그런데 그 본질적 속성이란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다시 창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