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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담론(신영복)

by 굼벵이(조용욱) 2015.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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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수님이 고맙게도 내가 세상에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잘 정리해서 담론으로 엮어 놓으셨네요.ㅎㅎㅎ

가감도 해석도 필요없는 이시대 최고의 지침서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석학들은 늘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반인이 경험할 수 없는 죽음에 가까운 아픔입니다.

아마도 그걸 넘어서야 진리를 발견하는 모양입니다.

책 읽을 시간이 없는 분들을 위해 제가 밑줄 그은 부분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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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연들이 모여 운명이 됩니다.

 

추억은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가다가 어느날 문득 가슴 찌르는 아픔이 되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친구가 될 수 없는 자는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될 수 없는 자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삶이 공부이고 공부가 삶이라는 까닭은 그것이 실천이고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읽는 것은 중국 고대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마천을 읽는 것입니다.

 

생명은 서바이벌을 운동원리로 하기 때문에 사람이란 일단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정집단 내에서는 이기적인 개체가 자기 보존에 유리하지만

집단 간의 투쟁에서는 이기적인 개체가 많은 집단이 이타적인 개체가 많은 집단에게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낭만은 불어로 로망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란 뜻입니다.

논리체계를 갖추지 않은 서술 일반을 로망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사소한 것이란 없습니다.

 

안다는 것은 복잡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하자면 시적인 틀에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그것을 說約이라고 했습니다.

 

無往不復 가기만 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전은 이미 오래된 미래입니다.

공자가 述而不作 이라고 했습니다.

서술만 하고 창작은 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 있습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자기능력의 70%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으라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높은 설산에 사는 토끼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일은

동상이 아니고 평지에 사는 코끼리가 자기보다 작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노동은 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

 

돌이켜보면 제자백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상앙 이사 같이 천하통일을 이끈 사람들도 결국 비극으로 끝납니다.

그 실패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한비자의 졸성(拙誠)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졸열하지만 성실한 삶, 그것은 언젠가는 피는 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싻 틔우고 열매 맺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고전은 태산이고 우리는 호미자루 들고 그 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

 

개인의 변화도 최종적으로는 인간관계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적 신뢰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시혜란 한마디로 잘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제자백가서의 모든 것이 사실은 강자의 논리입니다.

약자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온갖 노력을 집중할 뿐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할 여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면 빛납니다.

내가 징역살이 하면서 터득한 인간학이 있다면

모든 사람을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알다 깨닫다 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세계와 자기를 대면함으로써 자기와 세계를 함께 깨닫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처지를 함께 봅니다.

 

절도범이 강도범보다 간이 더 큽니다.

 

동물도 약한 놈은 강하게 보이려고 비명을 지릅니다.

맹수는 착한 척 소리 없이 다가갑니다.

본질은 같은데 어떤 사람은 위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은 위악을 행합니다.

문제는 위선이 미덕으로, 위악이 범죄로 재단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강자의 논리입니다.

요점은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과정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결혼하는 이유를 묻자

“그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

라고 답합니다.

 

나를 보다 좋은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관계야말로 최고의 관계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그래서 중요한 관계입니다.

 

돕는 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비를 함께 맞는 것입니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고 자기의 성을 떠나는 것이 여행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 다음이 만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떠나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없이 사는 사람이 어찌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하면서 살아요.

그냥 욕먹으며 사는 거지.

 

칼 폴라니가 상품화해서는 안될 것으로 자연, 인간, 그리고 화폐를 들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은 우리가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고 화폐는 실물이 아니라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아픔과 기쁨도 사람으로부터 나옵니다.

 

인간관계의 상실이 주는 아픔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마가렛미첼이 사라졌다고 통탄한 것은 문명이었습니다.

그것도 남부의 문명이었습니다. 이는 중세 유럽문화의 아류입니다.

 

사회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왕따구조입니다.

여러분도 실감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약자에게 얼마나 포악한지를...

 

부패문제를 윤리문제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부패의 근본 원인은 경쟁입니다.

사활이 걸린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직한 방법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부정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쟁은 옆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어제의 나 자신과의 경쟁이 되어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람이 생산하는 것은 없습니다.

소비자일 뿐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 미생물 따위는 소비자일 뿐이며 오로지 식물만이 생산자입니다.

 

산업자본이 자연과 노동을 수탈하는 것이라면

금융자본은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수탈하는 파괴적 시스템입니다.

 

가망없는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는 것이 불혹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품을 청산하는 단호함입니다.

 

해고와 구조조정 그리고 비정규직이 사람으로 사람을 거름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은 죽지 않는 이유고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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