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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인간의 품격(데이비드 브룩스)

by 굼벵이(조용욱) 2016.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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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1의 좌우명이 성공이라면

아담 2는 삶을 하나의 도덕적 드라마로 경험한다.

그의 좌우명은 사랑, 구원, 박애다.

솔로베이치크는 우리가 이 두 아담의 갈등 속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공은 가장 큰 실패, 즉 자만으로 이어진다.

실패는 가장 큰 성공, 즉 겸손과 배움으로 이어진다.

자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잊어야 한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을 잊어야 한다,

아담 1의 캐리어를 키우고 싶다면 힘을 길러야 하고,

아담 2의 도덕적 고갱이를 성장시키고 싶다면 자신의 결함과 직면해야 한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고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당부분 그릇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지식으로 지식인이 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지혜로 지혜로운 사람은 될 수 없다.

우리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 본성에 있게 마련인 편견과 자만을 어느 정도 극복한 사람들이다.

지적 겸손의 가장 완전한 의미는 멀리서 바라본 자신에 대한 정확한 자각이다.

가치있는 삶은 자신의 약점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데서 시작된다(해리 에머슨 포스딕목사)

자기중심성은 이기심과 자만심으로 이어진다.(우월욕망에 기인)

 

올라가기 위해선 일단 내려가야 한다.

깊은 겸손의 계곡으로 몸을 낮추어 스스로 고요해지고 평온해졌을 때

은총이 쏟아져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 (나의 승진도 그랬다)

겸양의 계곡에 들어선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자신이

기쁨과 헌신의 고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궁극적 기쁨은 도덕적 기쁨에서 온다.

 

프랜시스 퍼킨스

우리가 삶에서 기대하는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이다.(빅터 프랭클)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은

신이 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함)

"침묵의 계율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어.

무익한 세상, 무례한 말, 빈정거림, 분노에 찬 도전 등 온갖 유혹에 넘어가게 하지 않지.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얻게 되는지 정말 놀라워."

 

아이젠하워

대체 불가능한 사람은 없다.

내가 깊이 존경한 지도자는 모두 겸손의 미덕을 지닌 사람들이다.(폭스 코너)

어릴 때 분노를 누르는 법을 배웠듯이

커서는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도러시 데이

나는 숭배, 경배, 감사, 흠모가 이 생애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행위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가장 의미 있는 시기는 대개 시련을 겪었을 때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긴 하지만 시련을 통해서 성장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시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는가에 있다.

 

팔립 랜돌프와 베이어드 러스틴

인간은 그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죄인이다.

자신에게 유리하면 불의도 정당화 한다.

 

조지 엘리엇

내가 가장 빠지기 쉬운 죄 중에서도 가장 파괴력 있는 죄, 다른 모든 죄를 낳은 죄는

바로 야망, 동료 인간들에게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이야.

브레이는 인간의 의무란

신의 규칙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세상을 개선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주고

자기 자신 마져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굴복하는 것이다.

조건적 사고를 버리고 측정하려 하지 말고 있는 힘껏 쏟아내라고 한다.

(남자의 오르가즘과 힘찬 사정처럼,

산란기 낚시에 걸려 오는 물고기의 방정과 산란처럼......)

사랑은 쓸수록 늘어나기 때문이다.

눈 앞에 없는 선지자나 유명인 보다

바로 내 앞에 있는 보통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해야 한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한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었다.

사랑받을 가능성조차 사랑했다.

우리는 성적 욕망을 지칭할 때 욕정(lust)이라는 단어를 쓰곤 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이기적 욕망을 의미한다.

진정한 사랑을 품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는 데서 기쁨을 얻는다.

그러나 욕정은 받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욕정은 공허감으로 시작해서 공허감으로 끝난다.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내 숨겨진 부분이 무척 무섭다”라고 썼다.

심지어 동지애나 우정 같은 아름다운 관계도

더 고귀한 소명과 연결되지 않으면 왜곡될 수 있다.

친구끼리 배를 훔친 이야기도 타락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올바른 목표와 연결되지 않은 집단은 개개인보다 더 야만적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객관적 질서 안에 형성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니버가 말했듯 인간은 개별적이지만 자족적인 존재는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법칙은 삶의 원천이자 중심이 되는 신성함에 복종하는 삶들 간의

조화로운 관계로 이루어진 사랑이다.

인간이 삶의 중심과 원천을 자기 자신에게 놓으려 할 때 이 법칙이 훼손된다.

선은 항상 악을 동반한다.

자신감에는 자만심이, 정직함에는 무자비함이, 용기에는 만용이 따르듯이.

우리는 어둠이 빛을 차단하고 내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경계에 살고 있다.

애초에 우리는 혼자서는 좋은 삶으로 방향을 잡아나갈 수가 없다.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자기 힘으로 구원을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죄를 더 크게 만들게 된다고 믿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만의 죄를 허용하는 것이다.

pride란 자신 그리고 자신과 관련된 것들에 좋은 느낌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모든 창조는 하느님 몫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저 하늘의 창조를 대행하는 하수인에 불과할 뿐이다.

잘난 척 군림하고 지시하는 행위는 창조가 아닌 오만이다.

하느님의 창조는 그 생멸이 영원히 이어지지만

인간의 오만은 곧 자신을 무너뜨린다.

리더가 바뀌면 조직문화나 일하는 방식이 바뀌듯이

인간이 오만으로 만든 것들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자만심을 가진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만 주의를 기울인다.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대단해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기쁘게 만들면 바보가 된다.

(그래서 자신보다는 남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거다.

그게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탄식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뛰어들어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동안

우리는 머리만 가득 채웠지 가슴은 텅 빈 채로 피와 육체 속에서 뒹굴고 있군”

이 세상의 제1원인은 신이며,

신은 나에 관한 계획을 이미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은 내가 그것에 따라 살길 바라는 진리를 이미 갖고 있다.

(우리가 점을 보는 이유도 아마 그 계획을 알기 위함이 아닐까)

 

켈러가 말했듯이

 “신은 그리스도의 완벽한 희생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우리에게 돌려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신은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로 생각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할까?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가 되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사랑 덩어리로 만들겠다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곧 부처란 이야기와도 통한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은 신 즉 하나님으로 귀결된다)

 

제니퍼 허트는 ‘덕을 가장한다는 것’에서

“신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려 하는데 우리는 그걸 사려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내면에 질서를 부여할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오직 신뿐이다.

오직 신만이 우리의 욕망에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의 감정을 변화시킬 힘을 갖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겸손이 있는 곳에 위엄이 있다. 약함이 있는 곳에 힘이 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후자를 얻고 싶다면 전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다.

모든 영혼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신에게 맡길 때에만

질서와 참된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력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품 안에서 쉬기 전까지는 편안히 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신은 우리에게 은총을 주고 그것은 과분한 사랑이다.

신이 우리를 보호하고 보살펴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을뿐더러

스스로 얻을 능력도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은총은 창조와 함께 오는 선물이다.

(내가 승진한 이유는 내가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나의 승진을 통해 하시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은총을 받기 위해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스스로 은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일이다.

은총을 향해 자신을 열어야 한다. 은총은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러나 열려있고 섬세한 사람은 가장 필요한 시점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신의 은총이 찾아왔다고 증언한다.

폴 틸리히는 ‘흔들리는 터전’에서

은총은 우리가 큰 고통과 불안을 겪을 때 찾아온다.

무의미하고 공허한 삶의 어두운 계곡을 지나갈 때 갑자기 찾아온다.

“너는 받아들여졌다. 너는 받아들여졌다.

너보다 큰 존재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여라”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은총을 경험한 것이다.

신에게 의지하면 할수록 포부를 갖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능력이 커진다.

의존이 수동성을 야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능력과 성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교육은 사랑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새뮤엘 존슨

천재를 망치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이다.

게으른 사람은 혼자 있으면 안되고 혼자 있는 사람은 게으르면 안된다.

스스로 자신에게 하는 비난은 모두 간접적인 칭찬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여유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본성에서 나온 충동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다.

쓴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아라.

그리고 잘썼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만날 때마다 지워버려라

욕정은 성행위로, 허기는 식사로 해결되지만 슬픔은 해결책이 없다.

슬픔 위에 쌓이고 쌓여서 더 커질 뿐이다.

슬픔은 영혼에 낀 녹과 같아서 조금씩 비벼서 털어내야 한다.

슬픔은 정체되고 부패된 삶에서 오기 때문에

운동과 움직임으로 해소할 수 있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추구할 수 있는 목적은

자비를 만날 준비를 하는데 필요한 법칙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은총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아 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도, 감사, 선행, 사랑, 봉사와 같은 것들이다.)

 

몽테뉴

그는 자신의 성기에 대한 절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필요하지 않을 때는 너무나 귀찮게 방해를 하고

가장 필요로 할 때는 나무나 짜증나게 실망시킨다.”

우리 몸 한 군데라도 우리의 의지에 따라 일하기를 거부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지,

의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

각각의 인간은 그 안에 인류 전체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대중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몽테뉴는 자기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기를 원했다.

우둔하고 허튼 생각을 없애면 나 자신을 없앨 수밖에 없다.

모든 단점에는 그것을 보완해 주는 장점이 있게 마련이다.

 

존 러스킨은

이 세상에서 영혼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자신이 이해한 것을 담백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말 할 수 있는 사람 수 백 명 중에서 생각 할 수 있는 사람 한 두 명이 나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수 천 명 중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 한 명 정도 나온다.

 

엘리엇은

“우리 모두는 도덕적 백치로 태어나서

세상을 자신의 지고한 자아를 살찌우는 젖으로 여긴다.”고 했다.

 

칼 로저스는 가장 중요한 심리적 문제가

사람들이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칭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을 위한 길이다.

 

결론

 

1.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을 위해 산다.

삶은 본질적으로 향락의 드라마가 아니라 도덕적 드라마다.

 

2. 우리는 결함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선천적으로 이기적이고 오만한 방향으로 흐르려는 경향이 있다.

 

3. 결함 있는 존재들이지만 훌륭한 점들도 타고 났다.

자신을 상대로 투쟁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4. 자신을 상대로 투쟁할 때 겸양은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겸양은 결함과의 전투에서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적은 약자라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재능만으론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5. 오만은 모든 악의 중심에 있다.

 

6.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충족되고 나면 죄와 맞서 싸우고

덕목을 키우기 위한 투쟁이 삶의 중심 드라마가 된다.

내적 투쟁, 예를 들면 이기심, 편견, 불안감 같은 것들과의 투쟁은

삶의 의미와 형태를 부여한다.

그것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투쟁 보다 더 중요하다.

(내 생각으로는 투쟁한다기 보다는 올바른 선택을 쌓아간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올바른 선택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습관으로 고착되어 聖人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본다.)

 

7. 인격은 내적 투쟁과정에서 길러진다.

 

8. 우리를 옆길로 새게 만드는 것들은 단기적인 효과를 갖는 것들

즉 욕정, 두려움, 허영, 식탐 같은 것들이다.

 

9. 누구도 혼자 힘으로 자신을 완전히 억제할 수 없다.

외부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

것은 신, 가족, 친구, 조상, 규칙, 전통, 제도, 모범 등 여러 형태를 띨 수 있다.

 

10. 우리는 모두 궁극적으로 은총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그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면 감사의 마음이 영혼을 채우고 그와 함께 자신이 받은 것을 되돌려 주고,

봉사하고자 하는 욕망이 샘솟는다.

 

11. 결함을 물리친다는 것은 자아를 침묵하게 한다는 의미일 때가 종종 있다.

신중함, 겸손, 더 큰 무언가에 대한 순종 등 삼가는 태도를 몸에 습관처럼 익히고

존경하고 감탄하는 능력을 가지라.

 

12. 지혜는 인식론적 겸손에서 시작된다.

겸손한 사람은 순수한 이성보다 경험이 더 나은 스승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완벽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바로 지혜다.

 

13. 천직을 중심에 두고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본질적으로 마음에 끌리는 일을 섬기고 그 일을 잘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면

결국 간접적으로 자기 자신과 집단을 위해 일하게 된다.

천직은 바깥을 살피고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묻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이 본질적으로 끌리는 일들이 어떤 문제를 다루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14. 유능한 리더는 인간의 본성이 결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결에 따라 사람을 이끌려 한다.

 

15. 성숙함은 다른 사람보다 나아지는 게 아니고 이전의 자기 자신보다 나아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의존으로 가득찬 삶,

감사하는 마음과 존중과 감탄으로 가득 찬 삶에는 기쁨이 있다.

받아들여지는 느낌,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데도 다른 이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그들이 그들의 삶에 나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기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