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by 굼벵이(조용욱) 2016. 5. 31.
728x90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 약 7만년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속도를 빠르게 했다.

- 과학혁명이 시작된 것은 불과 500년 전이다.

 

우리는 뻔뻔스럽게도 스스로에게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이란 이름을 붙였다.

 

호모 사피엔스의 뇌는 신체의 2~3%에 불과하지만 뇌가 소모하는 에너지는

신체가 휴식상태일 때 전체의 25%나 된다.

(그래서 생각이 적으면 비만이 오는갑다.)

 

초기 석기의 가장 흔한 용도는 뼈를 쪼개 골수를 빼내는 일이었다.

마치 딱따구리가 나무 속 벌레를 꺼내먹듯...

 

인간의 몇몇 종들이 대형 사냥감을 정기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40만년 전이고

먹이사슬의 정점에 오른 것은 10만년 전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하면서부터이다.

 

인간은 최근까지도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두배로 잔인하고 위험해졌다.

치명적 전쟁에서 생태계 파괴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참사에서 많은 경우가

이처럼 너무 빠른 도약에서 유래했다.

 

호모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덕분이다.

세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했다.

이를 통해 긴밀한 협력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맘껏 이야기 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 뿐이다.

전설 신화, 신, 종교는 인지혁명과 함께 처음으로 등장했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하지만 허구 덕에 단순한 상상을 넘어 집단적으로 상상(신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신화들 덕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늑대와 침팬지는 개미보다는 협력적이지만 협동상대는 소수의 개체들 뿐이다.

사피엔스는 수없이 많은 이방인과 매우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다.

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로지 협력만이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데 개별경쟁을 조장하여 고성과를 창출한다고?)

 

자연상태 전형적인 침팬지 개체수는 20~50마리이다.

집단 내 개체수가 늘어나면 사회적 질서가 불안정해지고

결국에는 불화가 생겨서 새로운 집단을 구성한다.

 

과학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뒷담화로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 규모는 150명 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50명이 넘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알고지내며 효과적으로 뒷담화를 나눌 수 잇는 보통사람은 거의 없다.

 

호모사피엔스는 어떻게 이 결정적 임계치를 넘어 수십만명이 거주하는 도시

수억명이 넘는 지배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아마도 허구의 등장에 있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며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현대국가, 중세교회, 고대도시, 원시부족 모두 그렇다.

교회는 공통의 종교적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그 존재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들이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법인(corporation의 어원은 corpus 즉 몸이다)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무화과가 잔뜩 열린 나무를 발견한 석기시대 여성을 떠올려보자.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행동은 그 자리에서 최대한 먹어치우는 것이다.

개코원숭이가 따먹기 전에.

그러니 우리가 고칼로리 음식을 게걸스레 먹는 유전자가 이어질 밖에...

 

산업혁명 이전의 전쟁에서 90% 이상은 무기가 아니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으로 죽었다.

 

지난 100만년동안 평균 10만년마다 빙하기가 있었다.

최후 빙하기는 75000~15000년 전이었다.

 

역사적 기록은 인류를 생태계의 연쇄살인범으로 보이게끔 만든다.

 

기후변화 - 온도상승 - 얼음 녹음 - 수면상승 - 각종 세균 변화 - 전염병 창궐 - 대량학살 - 종의 변화

 

평균적인 농부는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나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더 열악한 식사였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농업혁명은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농업혁명 이전 식사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었다.

농부들은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최후까지 싸우는 경향이 있었다.

고고학은 단순 농경사회에서 사망의 15%가 인간의 폭력 탓임을 시사한다.

남성의 경우는 25%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한 것이 농업혁명의 핵심이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낙농가에서 젖소는 약 5년을 살다가 도살된다.

그 5년 동안 젖소는 항상 임신 중이며 출산한지 60~120일 내에 또다시 수태한다.

우유를 최대한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암송아지는 다음세대의 젖소로 길러지고 수놈은 육류산업에 넘겨진다.

(농민도 사실은 젖소와 같지 않을까?)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개개인은 큰 고통과 함께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모든 곳에서 지배자와 엘리트가 출현하고 이들은 농부가 생산한 잉여식량으로 먹고 살면서

농부에게는 겨우 연명할 식량밖에 남겨주지 않았다.

이렇게 빼앗은 잉여식량은 정치, 철학, 종교, 전쟁, 예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왕궁, 사원, 성채 따위가 그 산물이다.

근대 후기 인류의 90%가 구슬 땀을 흘리는 농부였고 그들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살리고 사치를 조장했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 사색가, 역사책에 기록된 엘리트들 말이다.

역사란 90%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들이 해온 무엇이다.

 

역사상의 전쟁과 혁명 대부분은 식량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의 선봉에 선 것은 굶주린 농부가 아니라 부유한 법률가들이었다.

 

생물학적 협력 본능이 부족함에도 수렵채집기에 서로 모르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공통의 신화덕분이었다.

신화는 수백만명의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매일 협력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창조한다,

사람들은 조상의 땅, 주식회사 등등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꼭 필요한 사회적 결속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자유?

생물학에 그런건 없다.

평등이나 권리 유한회사와 마찬가지로 자유란 사람들이 만들어낸 발명품이고 상상속에만 존재한다.

행복은 어떤가?

생물학적 연구는 쾌락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러므로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는 생명과 쾌락의 추구로 번역되어야 한다.

인권도 신화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1.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2.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예컨대 낭만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본주의 신화 따위가 그것이다.

마음은 늘 지배적 신화의 지시에 따르는 경우가 흔하다.

3.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

 

역사에 정의는 없다.

 

오늘날 세계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조각나 있지만 국가들은 빠른 속도로 독립성을 잃고 있다.

 

3세기에 걸친 모든 박해의 희생자를 다 합쳐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천명을 넘지 않았다.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명을 살해했다.

16~17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전쟁은 특히 악명 높다.

 

지난 2천년간 일신론자들은 모든 경쟁상대를 폭력으로 말살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되풀이 했다.

 

고타마 싯타르타의 위대한 발견.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에서 “지금 나는 무슨 경험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아야 한다.

열반은 집착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이며 문자 그대로 ‘불끄기’란 뜻이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고통 받지 않는다.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훈련을 시키는데 있다.

(Memento mori, Amor fati, Carpe diem과 같은 맥락이다.)

 

일신론적 종교의 제일원리는 “신은 존재한다. 그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인 반면

불교의 제일원리는 “번뇌는 존재한다. 나는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이다.

불교는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신들은 집착에서 고통이 일어난다는 법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현재의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1500년에 지구 전체에 살고 있던 호모사피엔스는 5억명이었다.

지금은 70억명이다.

인구는 14배로 늘었는데 생산량은 240배, 에너지 소비는 115배로 늘었다.

 

우리 몸 속에는 수십조마리의 단세포 생명체가 살고 있다.

이들은 무임승차자만은 아니다.

우리의 최고의 친구이자 치명적인 적이기도 하다.

그중 일부는 몸 속에서 음식을 소화시켜주고 장을 청소해주지만,

다른 일부는 병과 전염병을 일으킨다.

 

1775년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80%를 차지했다.

세계권력의 중심이 유럽으로 이동한 것은 175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이르러서다.

뭐가 오든 상관없다.

우리에게 기관총이 있고 그들에겐 없다.

통조림은 병사들을 먹여살렸고 철도와 증기선은 군대와 장비를 수송했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과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기술적 우위 이전부터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정복자들은 배 안에 학자들을 함께 태워 다녔다.

과학자와 정복자는 둘 다 무지를 인정하는데서 출발했다,

이들은 저 밖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소크라테스에게서 온 정신)

이들은 밖에 나가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겠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었다.

로마인, 몽골인, 아즈텍인들이 탐욕스럽게 새 땅을 정복한 것은 권력과 부를 찾아서였지

새 지식을 찾아서가 아니었다.

18~9세기 유럽을 출발해 먼 나라로 향한 군사탐험대는 거의 모두 과학자들을 배에 태우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과학지식의 발견이었다.

 

유럽 학자들은 산스크리스트어와 페르시아어 모두를 탄생시킨 원시언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리안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위대한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이 모두 아리아 인이라는 것이 우연일까?

아리아인이 단순한 언어집단이 아니라 생물학적 실체인 인종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그저 그런 인종이 아니라 지배인종, 키 크고 머리카락이 밝은 색이며 눈이 파랗고 근면하며

지극히 이성적이고 온 세상에 문화의 기초를 놓기 위해 북방 안개속에서 출현한 인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도와 페르시아를 침공한 아리아인들은 현지 원주민과 결혼해

흰 피부와 금발머리를 잃었으며 합리성과 근면성도 사라졌다.

그에 따라 인도와 페르시아 문명은 쇠퇴했다.

제국주의에서 인종주의가 차지하던 자리는 이제 문화주의가 차지했다.

 

우리 은행계좌의 모든 예금의 90%는 이에 대응하는 실제 화폐가 없다.

은행의 예금주들 모두 갑자기 인출요구하면 은행은 즉각 파산한다.

신용은 오늘의 파이와 내일의 파이 간의 차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신용이 넘쳐난다.

그 덕에 정부, 기업, 개인은 현재의 수입을 넘어서는 큰 돈을 장기 저리로 쉽게 빌린다.

지구의 파이가 커지고 있다는 믿음은 결국 혁명이 되었다.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을 위해 재추자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부와 자본을 구분한다.

자본이란 생산에 투자되는 재화와 자원을 말한다.

반면에 부는 땅에 묻혀있거나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된다.

비생산적인 피라미드에 자원을 쏟아 붓는 파라오는 자본주의가 아니다.

중세 사람들은 생산이 어느정도 일정하다고 생각했다.

재투자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귀족은 관대함과 과시적 소비라는 윤리를 신봉했다.

그래서 연회, 궁궐, 전쟁, 자선, 성당건축 따위에 돈을 썼다.

 

네덜란드 제국을 세운 것은 네덜란드라는 국가가 아니라 상인들이었다.

네덜란드상인들은 돈을 빌어서 정복사업자금을 댔지만

한편으론 회사의 주식을 팔아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식 소유자는 회사 이익의 일부를 받을 권리를 갖는다.

이들은 네덜란드 제국의 대들보가 된 주식회사에 기꺼이 재산을 투자했다.

가장 유명한 회사가 동인도 회사다.

1602년 인가를 받았다.

동인도회사의 돈은 인도네시아 정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200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대서양에서 움직였다.

허드슨강 입구 섬에 뉴암스트레담이라는 정착지를 건설했다.

식민지는 원주민과 영국의 공격을 받은 끝에 1664년 영국 수중에 들어갔고

섬의 이름을 뉴욕으로 바꾸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식민지를 원주민과 영국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세웠던 성벽(wall)이 wall street이다.

인도 아대륙을 정복한 것도 영국 정부가 아니라 영국 동인도회사의 용병들이었다.

19세기 전반 영국 동인도회사의 잡다한 사업가들은 마약수출로 돈을 벌었는데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것이 주종이었다.

수백만명의 중국인을 아편쟁이로 만들었다.

1830년대 말 중국정부가 마약거래 금지령을 내렸으나 영국 마약 상인들은 법을 완전히 무시했다.

많은 의원과 각료들은 마약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에 나서라고 압력을 넣었고 1840년 결국 자유무역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결국 중국은 평화조약에서 마약상인의 활동을 제약하디 않겠다고 약속했고

중국경찰이 마약상인에게 끼친 피해도 보상하겠다고 했다.

홍콩의 조차도 이때 시작되어 마약거래 기지로 삼았다.

19세기말 중국인구의 1/10에 이르는 4천만명이 마약중독자였다.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자들은 이집트에도 거액의 자금을 빌려주었는데 그게 수에즈운하를 열었다.

덕분에 이집트의 빚은 많아지고 민족주의자들이 모든 외국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하자

빅토리아 여왕은 나일강에 육군과 해군을 파견했고 이집트는 제2차세계대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이윤이 공정한 방식으로 얻어지거나 공정한 방식으로 분배되도록 보장하지 못한다.

기원전 8500년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 살 수 없다.

하지만 경제적 파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을까?

어두운 결말을 예언하는 사람들은 호모사피엔스가 조만간

지구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고갈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현대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미래를 신뢰하는 덕분이며

자본주의자들이 이윤을 생산에 재투자할 의사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진 않다.

경제성장에는 에너지와 원자재가 필요한데 이는 유한하다.

만일 이것이 고갈되는 때가 오면 전체 시스템은 붕괴된다.

모두를 움직이는 힘은 식물에게 포획되어서 밀과 감자와 쌀에 저장된 태양에너지였다.

화약이 발명되고 나서 약 600년 뒤에 효과적인 대포가 발달했다.

산업혁명의 핵심은 에너지전환의 혁명이다.

진화심리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야생에서 형성된 욕구는

설사 더 이상 생존과 번식에 필요하지 않다 하더라도 계속 주관적으로 느낀다는 점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농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2%에 불과하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

사람들이 항상 구매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윤리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비지상주의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결핍 속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검약이 표어였다.

스파르타인의 금욕도 그렇다.

소비지상주의는 재화와 용역의 소비를 긍적적으로 본다.

비만은 소비지상주의의 이중의 승리다.

너무 많이 먹고 다이어트 제품을 산다.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조심스럽게 관리하는데 반해

잘 못사는 사람은 빚을 내서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자동차와 TV를 산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부자의 지상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모두는 구매하라이다.


우리가 가축화한 모든 농장 동물 - 암소, 돼지, 양, 닭의 무게는 7억톤에 달한다.

현재 살아있는 대형 야생동물

- 호저에서 펭귄 코끼리 고래에 이르는 - 무게를 모두 합쳐도 1억톤에 못미친다.

세상에 남아있는 기린은 약 8만마리에 지나지 않지만 소는 15억미리에 이른다.

늑대는 20만마리지만 가축화된 개는 4억마리다.

침팬지는 25만미리지만 사람은 70억명이다.

인류는 정말로 지구를 접수했다.

생태계 파괴에 대한 두려움은 근거가 너무 확실하다.


국가와 시장은 개인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며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들 덕분이다.

국민은 국가가 만든 상상의 공동체다.

소비공동체는 시장이 만든 상상의 공동체다.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는 프랑스와 영국의 외교관들이

지역의 역사와 지리 경제를 무시하고 모래 위에 아무렇게나 그어놓은 경계선의 산물이다.

2000년에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31만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이와 별도로 52만 명이었다.

하지만 이 83만 명은 2000년 총 사망자 5600만 명의 1.5%에 불과하다.

자동차 사고가 126만명 자살이 81만 5천명이다.

2002년 자살자는 87만 3천명이다.

개인을 죽이는 것은 테러리스트나 군인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일 가능성이 크다.

 

핵무기는 초강대국 사이 전쟁을 집단자살로 바꾸어놓았으며

군대의 힘으로 지배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비용이 치솟는 반면 그 이익은 작아졌다.

평화는 훌륭한 배당이익을 낳는다.

우리시대는 평화를 사랑하는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상 최초의 시대다.

 

농부들은 수렵채집인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먹는 음식은 영양가도 더 적었고

근근히 버틸 양밖에 되지 않았다.

질병과 착취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

우리의 마음과 신체는 수렵채집인의 삶에 맞도록 주조되었는데

처음은 농업인으로 다음은 산업인으로 이행한 탓에 부자연스런 삶을 살았다.

타고난 성향과 본능에 부적합한 불만족스런 삶이라는 것이다.

동물 입장에서 보면 현대의 기업농은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신체 내부의 쾌락적인 감각이다.

혈관 속을 요동치며 흐르는 다양한 호르몬과 뇌의여러 부위에서 오가는 전기 신호의 폭풍에 반응하는 것이다

 

무리가 생물학적 행복론을 받아들인다면 역사는 별로 중요치 않다.

우리의 생화학에 역사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 똥기저귀를 갈면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행복은 총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바라보는데서 온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 속에 있는 것이다.

장자크 루소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선이고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악이다”라고 했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데 있다.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인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인 성취의 추구 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파악하는데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생각,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사피엔스 역시 사이보그로 변신하는 중이다.

최첨단 보청기는 바이오닉 귀이다.

물리학자들은 빅뱅을 특이점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알려진 모든 자연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지점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고 싶은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우리는 생물학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종이다.

생태학적 연쇄살인범이라 할 수 있다.

호모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다수가 유연하게 협동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협동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독특한 능력 때문이다. 신, 국가, 돈, 인권 등이 그 예다.

인간의 대규모 협동시스템- 종교, 청치체제, 교역 망, 법적제도도 모두 허구에 기반 한다.

이것은 우리 종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다.


돈은 가난을 벗어나게 해 주었을 때뿐 그것을 넘어서면 행복수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인간은 새로운 힘을 얻는데는 극단적으로 유능하지만

이 같은 힘을 더 큰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매우 미숙하다.

우리가 전보다 더 큰 힘을 지녔는데도 더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이론이라기 보단 종교이론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