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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난세의 인문학(신동준)

by 굼벵이(조용욱) 2016.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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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신사는 벼슬을 한 대부와 벼슬을 못한 사인을 합쳐 부른 말이다.

사대부와 같은 뜻이다.

학즉불고 배워야 고집스럽지 않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너자신을 알라'는 네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라고 한거고

그러니 공부하라고 한 것이며 결국 학즉불고와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동서양의 정치사상을 비교하면 소크라테스를 공자, 플라톤을 맹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순자

마키아벨리를 한비자에 엮을 수 있다.

군거화일 : 여럿이 모여살면서 하나로 조화된다.


귀곡자

명군은 홀로 결단할 뿐이다.

나를 전혀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상대를 파악해야한다.

이는 그물로 짐승을 잡는 이치와 같다.

사물은 모두 상대적인 존재일 뿐이다.

사물의 반면을 읽을 줄 알아야만 상대의 입장에서 유세할 수 있고

상대를 조정할 수 있는 책략을 낼 수 있다.


손자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외교를 배제한 군사는 맹목적이고 군사를 배제한 외교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모든 작전은 결정적인 지점에 병력을 집중하는 데 있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난세에는 인의에 기초한 왕도보다 실력에 기초한 패도를 앞세워야 한다.

조조의 휘하에 많은 장수가 몰려든 것도 신상필벌의 엄격한 준수 때문이다.

병법의 요체는 일정하게 정해진 모습이 없는 병무상형에 있다.

오직 상황에 따라 적을 속여 이기는 궤사만이 유일한 길이다.

궤사는 임기응변으로 구사되는 모든 무정형의 계책을 말한다.

조조는 장황한 보고를 질색했다.

본질을 꿰는 단 한 줄의 요약문과 발언을 중시했다.

사물의 본질을 통찰한 사람에게는 긴 말이 필요없다.


상자, 한비자

왕자의 왕국은 형벌이 9할이고 포상이 1할이다.

강자의 강국은 형벌이 7할이고 포상이 3할이다.

약자의 약국은 형벌이 5할이고 포상이 5할이다.

형반어덕, 인의도덕은 오히려 폭력을 조장한다.

힌두교 교리에 따르면 현상유지, 파괴, 창조는 처음과 끝이 없는 상태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위기 때 재빨리 변신하는 군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임기응변은 기존의 성공방식을 과감히 던지는 데서 시작한다.


관자

제자백가서 가운데 사치품을 포함한 소비촉진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관자 밖에 없다.

정부의 역할은 커지되 정부 크기는 줄어드는 형태로 가야한다.


묵자

맹자는 묵자가 말한 의정을 왕도, 폭군천벌론을 폭군방벌론으로 슬쩍 돌려 표현했다.

표절이다.

도가 가운데 노자는 유가처럼 제왕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으나

장자는 제왕은 물론 서민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묵자는 백성의 이용후생에 보탬이 되지 않는 모든 생산행위를 비판하며 절도 있는 소비를 역설했다.

필요에 따른 공급, 절제된 소비,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주장한거다.

(이는 근검절약이라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 같다)

하늘은 지극히 공평무사하고 사람처럼 의지를 지니고 있다.


맹자

하늘의 뜻은 서민의 뜻을 반영한다.

천지와 천의를 민의로 본 것이다.

서민이 곧 하늘이라고 본 거다.

그래서 군주는 반드시 의정을 펼쳐야 한다.

천자를 위시한 모든 위정자는 반드시 하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맹자는 이를 왕도로 표현했다.

위정자는 서민의 복리증진을 도모해야 한다.

하늘의 뜻을 저버리면 천벌을 받게 된다.

사상사적으로 볼때 맹자는 묵가에 편입되는 게 옳다.


노자

사람은 땅을 본받고(인법지), 땅은 하늘을 본받고(지법천), 하늘은 도를 본받고(천법도),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도법자연)

도덕경의 도는 자연의 이치를 언급한 것이다.

상덕은 부덕한 탓에 오히려 유덕하나 하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까닭에 오히려 무덕하다.

상덕은 무위한 탓에 인위적인 작위가 없으나 하덕은 유위한 탓에 작위가 있다.

정치적인 삶은 철학적인 삶보다 훨씬 어렵다.

동서고금의 모든 전쟁은 하잘것 없는 이해와 시비에서 비롯되었다.

노자가 분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는 무위와 무사 무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이유가 여기 있다.


장자

만세는 천자에게 장수를 기원하기 위한 술잔을 올릴 때만 사용한 용어다.

유한한 삶 위에 권력과 재물, 명예를 쌓기 위해 부질없이 남과 원한을 맺으며

정신 없이 살아가기 보다는 천지자연 속에 몸과 마음을 맡겨 유유자적하는 삶을 지향했다.

그는 예술 지상주의 탐미주의자다.

물은 이물질과 섞이지 않으면 맑은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흔들리지 않으면 수평을 이룬다.

막고 닫아서 흐르지 못하게 하면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천덕의 모습이 이와 같다.

세속의 관행과 가치로부터 벗어나 마음을 순수하게 만드는 것을 심재라 한다.

심재를 통해 양신을 이뤄야 천지자연의 변환운행에 자연스레 올라탈 수 있다.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면 높은 지위와 넉넉한 재산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은 그가 물을 잊었기 때문이다.

외물에 휘둘리면 이내 마음이 졸렬해진다.

난득호도(難得糊途), 총명해지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어리석은 체 하는 것은 더 어렵다.

大智若愚와 같은 의미다.

호도는 원래 깨진 도자기를 살짝 풀을 붙여 온전한 것처럼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한다.

서양의 지성사는 나와 너의 대립을 무차별적으로 진행시킨 역사다.

2분법적 접근은 인간소외와 지구 황폐화로 나타났다.

이 모두 너가 없는 나가 없고 나가 없는 너가 없다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엄중한 이치를 무시한 채 사물을 서로 대립관계로 분절시킨 결과 나타난 현상이다.

화이트헤드는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그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플라톤 이래 축소지향의 통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동양은 공동체 위주의 확대지향 통치를 지향했다.

동양 사상가는 단 한번도 신의 죽음을 선언한 적이 없다.

서양은 만물에 내재하는 대립과 모순을 지양하기 위한 해법으로

투쟁과 발전 개념밖에 제시하지 못했으나 동양은 조화와 순환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제자백가가 모두 동질성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 결과다.

본질적인 동질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자연의 도에 몸을 의탁하고

천지 자연의 흐름에 자연스레 순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