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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신이 된 시장(하비 콕스)

by 굼벵이(조용욱) 2018.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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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가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고 영구한것은 아니며

앞으로 우리와 함께 할 것임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인간은 도구 제작자이며 이야기꾼이다

고고학자들은 도구를 찾아낼 수 있지만 소리와 몸짓으로 엮은 이야기는 사라졌다

시장은 항상 도시의 물리적 중심인 사원구역에 자리했다.
그곳은 언제나 희생제물로 사용되는 짐승과 새를 파는 장사치가 많았다

예수가 환전상에게 채찍을 휘두른 것은 그들이 하는 장사나 희생 의례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수수료가 터무니 없이 비싸기 때문이다

그들은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

예수는 그들이 가난 하고 무방비 상태인 순례자를 속이고

신전의 사제들이 환전상이 버는 수입에서 자기 몫을 쏠쏠히 챙기는 걸 알았을 것이다

이제 새로운 인간을 보라

현대의 법인을 보라

지난 세기에 장황하게 얽힌 법률과 판례를 통해 등장한 현대의 법인 기업은

제우스와 아테나 같은 올림포스 산의 지위에 다달았다

법인 기업은 생명을 무기한 이을 수 있다

법인 기업을 창설하고 조직하고 경영하는 미천한 인간은 나이들어서 죽지만

법인 기업은 여전히 존재한다
사람이나 법인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이익을 세계 전체는 아닐지라도

더 큰 사회의 이해관계과 동일시 하는것은 강력한 유혹이다

제너럴 모터스의 경우 제너럴 모터스에 좋은것은 미국에도 좋은 것이며

미국에 좋은것은 general motors에도 좋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자원을 재화 용역의 생산과 동떨어진 금융 활동에 쏟아 붓는다

이 활동은 사회적 생산성에 비례하지 않는 높은 사적 보수를 발생시킨다

토비는 더 나아가 컴퓨터가 이런 종이 경제에 연결되면서 동일한 업무를

좀 더 경제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금융거래의 양과 다양성을 부풀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토비는 요컨대 엄청난 규모로 확대된 금융 경제는 마치 종양처럼 이제

실물경제에 봉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갈 시킨다

자본뿐 아니라 인재까지 고갈시킨다고 했다

실제로 세계 10대 교회 중 5개가 한국에 있다

전 세계에서 기독교 단일 교회 중 가장 큰것은 서울의 여의도 순복음 교회다

80만명이 넘는다
초대형 교회가 기업과 가장 흡사한 특징은 어느 학자가 말한 것처럼

혹독하게 성장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십일조는 먹고살기 어려운 고대사회에 신도 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닐까?

종교공동체가 소득 재분배 기능을 수행한데서 유래한 것 아닐까?

따라서  국가가 세금으로 그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 현대에는 부적합한 제도라고 본다)
신자 규모가 엄청나면서 양 한마리가 길을 잃어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봉사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십일조를 거두어 시행할것이 아니라 국가가 세금으로 체계적인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교회는 단지 그들만의 신도사회 안에서 그들만을 위한 재분배나 봉사활동을 시행하면 되는 것이다)

기업이나 종교에서 과연 크기가 중요한가

내 결론은 크기가 중요하지만 상이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방식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느것도 영원히 커질수는 없는 법 사방이 초대형으로 뒤덮인 시대에도 아니

그런 시대야말로 작은것이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전 후 독일을 보자 서독은 전쟁복구 설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유럽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한 마셜 플랜 있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이 서독을 동맹국으로 편입하고 서독에 수천명을 주둔시켰다

독일 민주 공화국 다시 말하면 동독은 그런 자금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소련은 자국민이 사용하기 위한 제조업 설비를 열차로 실어가버렸다
결국 라인강의 기적은 수 많은 세속적인 시장 덕분에 일어난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당대에 크게 유행한 자연 신학의 실천가로서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할 때 제정한 자연법을 통해서 일하지

자연법을 거스르면서 일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를 도덕신학자 어쩌면 일종의 예언자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이래서 나온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그 얼마전에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정교하게 가공한 것이다

리고 아퀴나스는 여전히 로마 카톨릭의 공식 철학자다

19세기 독일 개신교 신학은 헤겔과 칸트 등이 정립한 범주를 활용했다
smith 신학의 또다른 중요한 원천은 당시 명칭으로 하면 자연신학으로

신이 인간을 위해 두권의 책을 썼다는 전제하에 입각한 것이다

하나는 성서 다른 하나는 자연인데 보통 대문자로 Nature 라고 썼다
존슨은 말은 모든 중요한 점에서 돈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말에는 본래적인 가치나 의미가 없으며

관습과 일상적인 용법에 따라 가치와 의미가 할당 될 뿐이다

말은 거울과 비슷하다

그 자체는 텅비었지만 그 앞에 놓는 사물만큼 잠재적인 의미가 많은 사회적 관습이다.

언어는 그렇게 허깨비같은 것이기때문에 우리가

자신이나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말에 의지하는것은 잘못이다

말은 실질적인 의미가 전혀 없기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사람을 매혹하고 설득하고

심지어 우쭐하게 치켜세우기 위해 말을 사용할 수 있다

말은 쓰라고 있는 것이다
(말을 신으로 바꾸어보라)


사람은 일정한 수준에서 자기가 속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즐긴다

여자몸을 톱으로 반토막 내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큰돈을 내고

자기가 속는다는 걸 알고 의심하면서도 빤히 보이는 수작에 기꺼이 발을 들여놓는다

우리는 모두 가장 피크닉에 참여하는 배우이자 바보 배에 탄 승객이다

소설은 독자가 기꺼이 공모하는 거짓말의 직조이다.
저자들의 저자라고 부르는 하나님조차 인간이 처한 조건의 온갖 모순과 수수께끼를 피하지 못한다
맥도날드가 알려진 세계의 구석구석으로 확산되는 현상은 어떤 면에서

초기 기독교의 폭발적 팽창과 흡사 하다

새로운 종교는 예수가 산때부터 200년도 되지 않아 영국과 스페인에 도달하고

아프리카를 가로질렀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인도까지 파고들었다

그 직후 네스토리우스파와 기독교 공동체가 중국에 등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리적으로 분산되고 문화적으로 상이한 기독교의 진영과 분파 사이에

신학, 전례,조직, 구조등을 둘러싸고 분열이 나타났다

페르시아와 아비시니아 이집트 인도에서 가지각색의 기독교가 성장했고

로마 주교가 하나로 묶으려고 했지만 분열이 발생했다

이런 분열은 대부분 지금까지 이어진다

(맥도날드가 버거킹이나 롯데리아로 분열하여 대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은 생각의 방향을 하나로 모으는 관념적 도구이다.

시장, 국가, 종교, 학교 따위도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 모두가 다 신이다.)
뉴 잉글랜드에 정착한 칼뱅주의 성향이 강한 청교도는 성탄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성탄절이 이교적이고 천주교적이었다

어쨌든 크리스마스에는 미사란 단어가 들었고

소나무는 이를 연상시키는 요정과 숲의 정령의 냄새를 풍긴다
초기 기독교는 성탄절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로 생각했는데

산타클로스와 꼬맹이 팀 루돌프가 무대 전면을 차지하면서

종종 원래의 중심점이 사라진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인이 12월 마지막 동안 고조되는 지나친 음주와

화려한 물질주의 흥청망청한 분위기를 개탄하는 가운데

사투르날리아를 슬쩍 흡수한 과거를 상기해도 좋을 것이다

사투르날리아는 음주와 흥청거림으로 유명했다.
19세기 이전의 미국인은 집에서 구운 빵과 직접 뜨개질한 옷가지를 주고 받는것을 선호했고

상점에서 산 선물을 주고 받는것은 멋 없고 인간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세기가 끝날 무렵 광고업자들이 막대한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제조업 기성품으로 취향이 바뀌었다
전통적인 기도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안다

시장도 그 욕망을 알고 싶어 한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목적은 우리에게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할 능력을 주는 것이다

반면 시장이 추구하는 목적은 판매량을 늘리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생명 형태는 박테리아다

박테리아는 1억년 동안 번성한 반면 인간은 불과 수십만 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시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은 진정한 실체가 없고 언제나 잘못된 선이라고 가르쳤다

오늘날 시장이 처한 곤경도 이런 것이다

우리는 시장경제를 보유하는데서 우리 스스로 시장 사회가 되는쪽으로 서서히 이동했다
그는 때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세상에 주입해 온 일신교가

인간의 모든 전쟁과 충돌이 근원이라고 비난하며 나를 질책한다

그는 인류가 다신교에 머물렀다면 더 잘 살 것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