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장폴 사르트르 시선과 타자(변광배)

by 굼벵이(조용욱) 2019. 11. 1.
728x90

  

사르트르는 인간이 의식을 통해 다른 존재와 맺는 관계는 인식관계가 아니라 존재관계로 보고 있다.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를 가지고 자신의 지향성의 구조를 채워야만 한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

인간은 영원히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인간이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의식의 지향성의 구조로 인해 발생하는 당연한 결과이다.

이처럼 자신의 지향성의 구조를 무엇인가로 채우기 위해 이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겨냥하고 잘라내는 작용을 무화작용으로 규정한다.

인간은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의식을 비어있는 상태로 둘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겨냥하고 잘라내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의식의 지향성의 구조를 채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잉여존재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거기에 있으며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할 필연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본질적인 것 그것은 우연성이다.

원래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에게 있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인간은 신의 지적 디자인을 부정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창조해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존재근거를 추구함으로써 이유를 알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자와 즉자의 결합상태는 비록 이 상태가 논리적으로는 모순되지만 인간이 끝까지 추구해야하는 이상적 상태라는 것이다.

시선의 주체는 자신의 시선을 통해 그가 바라보는 것을 객체로 사로잡으며 자신의 힘을 계량하는 것이다.

타자는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 비밀은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이다.

타자는 나를 존재케 하며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를 소유한다.

나에게 있어 타자는 나의 존재를 훔쳐가는 자이다.

사랑은 이미 내부에 실패의 싹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다.

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녀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자유와 주체성을 포기하면서 스스로 객체성의 상태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면서 얻고자 했던 것은 객체로 전락한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 항상 주체성과 자유를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나는 그녀의 사랑을 얻긴 했지만, 내가 가지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는 주체성과 자유를 간직한 그녀가 아니라 한갓 객체로 전락해버린 그녀인 것이다

애무는 타자를 육체화하는 의식들의 총체인 것이다.

타자가 있는 이 세계에 내가 출현한 사실 자체가 나의 원죄(原罪),를 대변하는 것이다.

원죄란 이처럼 이미 타자가 존재하는 세계에 내가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타자와 어떤 관계를 맺든지 간에 그 관계들은 나의 죄의식이라는 이 원초적인 테마의 다양한 변주에 불과할 따름이다.

식탁에 있는 물병까지도 물병이 되는 희극을 하고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온통 희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타자란 근본적으로 나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자이다.

타자는 내가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타자는 나의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