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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여자 없는 남자들(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by 굼벵이(조용욱) 2020.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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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일종의 포르노다.

그의 소설에 성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이 들어가지 않은 소설은 없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성이 본류를 이룬다.

나는 그걸 비난하거나 격하시키고 싶지 않다.

그것은 그만의 장르이고 그가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이며 나 또한 그의 생각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내 삶을 보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닌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 속 많은 부분을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게 사실이다.

겉으로는 자기는 안 그런 척 나를 욕할지 모르지만 그 어떤 사람도 나같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게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개나 고양이 또한 나와 같다.

프로이트는 이를 id의 세계로 표현했고 삶의 추동, 생의 에너지로 생각했다.

하루키는 그걸 잘 이용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일본 최고의 소설가 반열에 올랐다.

그의 단편들 속 명구 몇 개를 골라봤다.

 

드라이브 마이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건 특히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뭐랄까 보다 총체적인 문제야 더 애매하고 더 제멋대로고 더 서글픈 거야.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해도.

 

사는 것 자체가 명줄 줄이는 거잖아요.

 

독립기관

 

모든 여자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어떤 거짓말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여자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그것도 중요한 일로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 아무튼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때 대부분의 여자들은 얼굴빛 하나, 목소리 하나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 몸의 독립기관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녀들의 아름다운 양심이 상처받거나, 그녀들의 평안한 잠이 방해받거나 하는 일은-특수한 예외를 별도로 친다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음식을 넘기지도 못할 만큼 통절한 사랑에 빠져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밀었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광경을 목도했고, 그 결과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고토 청년의 말을 빌리자면 무에 접근시킨 것이다.

어느 쪽의 인생이 그에게 진정한 행복이었는지, 혹은 진짜였는지 나는 판단할 수 없다.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생각컨대 그여자가 (아마도)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거짓말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의미는 다르겠지만.

도카이 의사 또한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사랑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음을 뒤흔들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고, 때로는 죽음에 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기관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분명 몹시 퉁명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혹은 단순한 기교의 나열로 끝나버릴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순간에 도카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깨달았을지 , 물론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그 깊은 고뇌와 고통 속에서도,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나에게 새 스쿼시 라켓을 전달해 달라는 말을 남길 만한 의식은 되찾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거기에 어떤 메시지를 담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인지 죽음을 앞둔 그에게는 그 답 비슷한 것이 조금은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카이 의사는 그것을 내게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다.

 

셰에라자드 - 천일야화의 왕비

 

“아니, 그게 다는 아니야." 셰에라자드는 말했다.

“나는 그의 물건을 뭔가 하나 갖고 싶었어.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을 집에 가져가고 싶었지.

하지만 중요한 것이어서는 안 돼.

그랬다간 없어졌다는 걸 금세 눈치 챌 테니깐 그래서 연필을 딱 한 자루만 훔치기로 했어.

“연필 한 자루?"

“응. 쓰던 연필. 하지만 그냥 훔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어. 그러면 단순한 빈집털이일 뿐이잖아 그게 나라는 것의 의미가 없어져버려.

나는 말하자면 '사랑의 도둑'이니까.

그게 나를 엄청 흥분시켰어.

그의 서랍 깊숙이 아무도 모르게 내 탐폰이 들어있다는 게 말야

아마 너무 흥분한 탓이었는지도 몰라.

그러고는 바로 생리가 시작되었어.

사랑의 도둑 연필과 탐폰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 후 어디론가 사라지면 된다.

 

여자 없는 남자들

 

당신은 연한 색 페르시아 카펫이고 고독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보르도 와인 얼룩이다. 그렇게 고독은 프랑스에서 실려 오고 상처의 통증은 중동에서 들어 온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게 세계란 광대하고 통절한 혼합이며 그건 그대로 고스란히 달의 뒷면이다.

선원의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메타포의 뾰족한 압핀을 훌훌 뿌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