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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타밈 안사리)

by 굼벵이(조용욱) 2020.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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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도 알고 보면 사회적으로 구성된 특정 관점 중심의 세계사적 서사다 유럽 중심의 세계사적 서사 이슬람 중심의 세계사적 서사 중국 중심의 세계사적 서사 등등이다

 

역사는 사실을 다루지만 그 사실은 기본적으로 서사에 종속된다.

 

개인의 정신은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

 

오늘날 우리는 북서쪽에서 나타나 인더스강 유역을 거쳐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출한 이주민들을 베다인 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는 베다로 불리는 성가 형태의 경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성가는 현재까지 수천 곡이 남아있다 브라만으로 불린 사제들은 성가를 기억했다가 그대로 구술을 통해 후세에 전해줬다 베다는 고대인들의 삶이 다채롭게 표현된 경전이다

하라파 문명의 전성기에 목동과 소농으로 구성된 여러 부족이 옥수스강 북쪽의 초원 지대에 살고 있었다. 그 부족들은 자신을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인 아리아인으로 불렀다 약 사천 년 전 그들은 트란스 옥시아나를 떠나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향한 사람들은 인더스강 유역에 이르렀다. 그들은 하라파인들이 남긴 문명의 흔적을 흡수했고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베다인 이라고 부른다. 서쪽으로 향한 사람은 이란(즉 아리안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함께 불렀던 성가는 남쪽의 인도에서는 베다 서쪽의 이란에서는 아베스타로 불렸다.

 

베다 인들이 섬기는 신들의 목록에는 각각 데바(deva)와 아수라(asura)로 불린 두 무리의 존재가 포함되었다 데바는 천사였고 아수라는 악마였다. 아베스타 문화에서는 두 무리로 나뉜 신들의 정체성이 바뀌었다. 즉 이란 지역에서는 데바가 악마였고 아후라가 천사였다

미트라는 베다인들 사이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신으로 통했지만 이란 지역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다음으로 제일 위풍당당하고 강력한 신으로 성장했다 왜 그랬을까 미트라는 계약의 신이었다. 풍요의 신이 농경 세계와 관계있듯이 계약의 신은 원거리 교역을 교육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와 관계있었다.

그들이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려 했던 것은 생존을 위해 네 편과 내 편을 구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걸 구분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웠기 때문)

명확한 거래를 위해 이분법이 발달했고 이는 범주화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의 사고체계를 낳았다.

디에바는 신들이 부모였다 디에바는 아후라를 낳았지만, 자식인 아후라에게 위협을 받는다고 느꼈고 결국 아후라를 죽이려고 했다 아후라는 맞서 싸웠고 그렇게 해서 웅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삶의 의미는 그 투쟁에 있었다.

예언자 조로아스터도 이같은 주제를 간추려 하나의 신념체계를 만들었다. 기원전 1200년경 늦게는 600년경 일어난 일이다. 전설에 의하면 조로아스터는 수선공이었다. 그는 어느 날 산에 올라 창조와 불의 신을 알현하라는 초자연적 부름을 받았다. 거기서 아후라 마즈다는 인간에게 전할 말을 알려줬다. 우주 차원의 선악 대결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었다. 인간은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었고 삶의 의미는 그런 선택에 있었다.

제국 규모의 확장은 메시지 전달 속도의 향상과 관계있었고 메시지 전달 속도 향상은 기술과 기반시설의 발전을 반영했다.

 

쐐기 문자의 출발점은 사물을 묘사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신성 문자가 출현하고 있었다. 그 기호들은 종교에서 유래 되었다 신성 문자의 초기 형태는 실제 사건이나 가공의 사건을 기록하고자 신전의 벽과 중요한 인물들의 묘지에 그린 그림이었다. 그것은 창의성이 풍부한 오늘날의 장편 만화 같은 무언의 이야기였다 이후 그림은 점차 간략화와 양식화를 거쳤고 결국 갖가지 사물을 나타내는 기호인 상형문자로 진화했다.

그토록 방대한 영토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관리, 메시지 전달, , 수학, 군사력, 거대서사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시황제는 법가라는 반유교 사상을 국가의 공식 강령으로 삼았다 공자의 사상 체계가 온화하고 직관적인 만큼 법가는 엄격하고 독단적이었다. 법가는 마땅히 지켜야 할 엄중한 법을 규정했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 받아야 할 처벌을 명기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초창기의 모든 제국이 그랬듯이 시황제 치세의 중국도 도로, 여인숙, 대규모 우편 제도, 광범위한 첩보망 따위를 갖췄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509년에 왕을 축출하면서 궁극적 정체성을 향한 의미심장한 전환점을 맞았다 그때부터 내내 로마는 당시로써는 특이한 정치제도 몇백 명의 남자들로 구성된 원로원이 운영하는 정부를 갖추게 되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선출되었다. 그러나 토지를 가진 로마의 지도급 인사들인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원로원은 해마다 두 명의 원로원 의원을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이후 로마의 집정관은 원로원의 추천을 받아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집정관은 항상 1명이 아니라 2명이어야 했고 임기 1년이 지나면 2명의 정무관은 모두 물러나야 했고 새로운 2명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로마인들은 왕정을 몹시 경계했다

그리스의 황금시대가 절정을 구가할 무렵 로마에서는 지주대 소작농 귀족 대 평민 권력층 대 서민층 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두 사회 계급은 평민들만의 투표로 선출되는 관직을 신설 함으로써 타협에 이르렀다 그렇게 탄생한 이른바 호민관들은 한가지 권한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막강한 권력이었다. 그들은 반대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원로원의 제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12표법이라는 법전도 마련했다 집정관들보다 원로 원보다 아니 그 어느 인간보다 더 높은 권위를 지닌 것으로 법을 소중히 여겼다. 로마인들은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관념을 선보였다.

로마인들은 젖은 상태일 때 가장 단단해지는 콘크리트를 발명했다가 그리고 공성용 기계 장치와 공학적 역량에 힘입어 로마인들은 다른 도시들을 마음대로 점령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돌바닥 위에 깔린 전대미문의 도로망으로 지중해를 에워쌌다 페르시아의 도로망보다 월등한 도로망이자 그때까지 건설된 것 중 최고인 48천 킬로미터 길이의 도로망을 발판으로 로마인들은 반역자들이 손 쓰기 전에 먼저 분쟁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애국심은 로마인들에게 종교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인간과 신의를 아우르는 자연계라는 틀 속에서 신들을 바라봤다. 요컨대 로마는 섬세함이 없는 그리스였다. 철학자는 없었지만, 공학자와 콘크리트가 있었다.

 

원래 불교도들은 조각으로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하는데 거부감을 드러냈다. 부처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샨인들의 세계에서 불교도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남겨둔 그리스 문화의 향기를 맡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신의 영적인 분위기를 경험하고자 일상적으로 신상을 만들었고 그리스적 색채가 남아있는 환경의 영향으로 불교도들은 부처의 이목구비와 자세를 통해 영적인 평정을 표현하고자 부처의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계약의 신 미트라는 마이트레이야 즉 미륵보살이 되었다

보살 사상을 중심으로 삼은 완전히 새로운 신앙 양식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하야나 불교 대승불교였다 대승은 큰 수레라는 뜻이다. 이 교파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 반드시 개개의 영혼이 홀로 수행하는 고독한 여정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길은 평범한 여러 사람을 배에 태운 채 항해하는 보살이 이끄는 공동의 모험이었다

몇몇 경건한 신자들은 열반에 이르고자 매일 노력할 수 있었고 반면 일반인들은 승려들을 돕고 뒷받침하기만 해도 궁극의 목표에 조금씩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부처는 개별 영혼의 여정에 관심을 두었다 공자는 개인의 사회적 맥락에 관심을 두었다. 부처는 우주에 관심을 쏟았다. 공자는 가정과 제국에 관심을 쏟았다. 부처는 이 물질세계에서 벗어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공자는 이 물질세계에서 품격있게 처신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부처는 영겁의 세계와 하나가 되는 데 주목했다. 공자는 지금 여기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데 주목했다

노자는 개인이 이 세상의 고난과 혼란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에 집중했다 그는 인간이 모든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고 말했다 노자에 따르면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집착할 것인가 아니면 내려놓을 것인가라는 문제뿐이었다. 노자의 사상에 감화된 사람은 자연 속에서의 평화로운 고독을 모색하고 관찰과 관조 같은 미덕을 실천하고 평온함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도교는 유교만큼 자생적인 중국 문명의 산물이었다

미트라 밀교의 중심인물은 동정녀인 어머니 아나히타에게서 태어났다 아나히타는 신을 낳은 인간이었다. 미트라는 동짓날쯤인 1225일경에 태어났다 지상에 머무는 동안 미트라 옆에는 황도 12궁에 해당하는 12명의 제자가 따라 다녔다. 처녀 강탄, 인류의 구원자, 1225, 12명의 제자 혹시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미트라 밀교는 기독교가 전래되기 얼마 전에 로마제국에서 갑자기 번창하기 시작했다 이후 미트라 밀교와 기독교는 그리스 로마적 세계에서 대등한 영적 경쟁을 펼쳤다 최종적으로 기독교가 승리했고 서기 4세기 무렵의 미트라 밀교는 완전히 소멸했지만 후발 주자인 기독교적 서사에 나름의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예수에게는 소수의 신봉자가 있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몇몇 신봉자는 예수가 죽지 않았다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살아있는 예수의 모습을 얼핏 봤다고 말했다 소문이 퍼지자 예수의 신봉자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런 식의 예수 운동은 얼마 뒤 정통 유대교에서 이탈했다.

주류 유대인들은 이 지상에서 인간의 몸으로 걸어 다니는 누군가를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최악의 신성 모독으로 여겼다. 반면 기독교인들의 시각에서 그런 주장은 신앙의 핵심 조건이었다 기독교인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백성들에게 왕국을 약속했지만, 이것은 지상의 왕국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죽은 뒤의 영원히 머물 천상의 왕국 즉 천국이었다. 천국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상상한 사후세계와 비슷했다.

기독교는 세속적 영역도 신적 영역도 존재하지만, 그 두 가지는 서로 별개의 영역이라는 그리스 로마적 관념과 충분히 조화를 이뤘다. 둘째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대다수 주민이 실제로 겪고 있는 삶에 관심을 쏟으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무렵 로마제국 인구의 25% 이상이 노예였다

하나의 서사가 다른 서사에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수단은 물리적 무기가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내는 솜씨다

게르만은 사실 로마인들이 고트족, 반달족 수에비족 등의 부족들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였다. 게르만은 '늘 말썽을 일으키는 북쪽의 불량배의 무리' 같은 존재를 의미했다

그들은 더 나은 땅과 조건을 찾아 쉼 없이 움직이는 불안정 하고 가난한 농부들이었고 꾸준히 남쪽으로 이동했다.

로마제국 정부가 변경의 장군을 민정 책임자로 임명해 현지에서 로마식 질서를 확립하도록 지시 한 것은 때에 따라서는 합리적인 조치였다 그 민정 책임자들은 comes로 불렸고 코메스라는 단어에서 백작 count라는 칭호가 유래 됐다. 로마 영토에 들어와 일정한 지역을 차지한 게르만 족장을 해당 지역의 총독으로 부르고 그가 거둬들이는 곡물을 그 급료로 치부 하는 것은 이치에 맞았다 이 작은 단위의 왕들은 둑스dux로 불렸고 공작 듀크의 어원이 되었다.

처음부터 무슬림들은 그들의 종교를 정치적인 것으로 경험했다 신의 명령이 이상적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처방전이라면 그 점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의 사도가 공동체를 통치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다섯 가지 공식 교리는 첫째 신의 유일성을 증거해야 하고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로 인정해야 한다. 둘째 매일 다섯 번씩 기도 의식을 치러야 한다. 셋째 수입의 일정 부분을 자선 목적으로 기부해야 한다. 넷째, 일 년 중 특정 달에 금식해야 한다. 다섯째 되도록 평생에 걸쳐 적어도 한번은 성지인 메카 순례를 떠나야 한다.

이슬람교는 국가였다. 이웃들을 정복하는 것은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이집트 같은 모든 국가가 했던 일에 불과했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정복 사업이 여타의 정복 사업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고귀한 목적 이슬람 율법 즉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는 공동체의 생존을 확보함으로써 신의 뜻이 이 세상에서 꾸준히 입증되고 본보기를 통해 이웃들을 깨우칠 수 있게 하는 것에 있었다.

기독교는 강력한 제국에서 노예들과 빈자들의 종교로 출발했다. 이슬람교는 소규모지만 스스로 통치하는 독립적인 집단의 종교로 출발했다. 기독교는 국가 내에서 생겨났고 국가의 여러 조직을 넘겨받아 정치적 권력을 획득했다. 이슬람교는 이웃들과 이웃들의 이웃들을 정복해 정치 권력을 획득했다. 서로 다른 경로였지만 결과는 같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모두 거대해지고 막강 됐다 무슬림이 지배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결코 강제로 이슬람교에 회귀 하지 않았다 신의 사도는 '종교의 강제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무슬림 공동체 일원이 되면 혜택이 따랐다. 개종하면 혜택을 입을 수 있었고 개종하지 않으면 손해였다. 말 그대로 손해였다 무슬림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금을 내야 했다

무슬림은 종교와 정치가 한 몸이지만 기독교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다.

무슬림은 종교라기보단 정치시스템에 가깝다.

중국의 불교도들은 인도의 불교도들이 다르마 dharma로 부른 것을 표현할 때 도라는 용어를 썼다. 인도 불교도들이 열반 개념을 표현할 때는 도교 용어인 무위를 썼다.

 

공자의 가르침과 사상은 한국문화와 베트남 문화에 침투했고 오늘날까지 두 문화에 남아 있다. 불교는 베트남에는 원래 형태로 스며들었고 일본에는 바뀐 형태로 전파되었지만 오늘날 두 나라에는 모두 불교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반어적이게도 영원히 사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화약을 발명했다

수도원은 그 새로운 세계사적 단자의 핵심 요소였다. 초기 기독교 시대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수도원은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하였고 교회의 경쟁자가 아닌 동지 역할을 수행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들은 온대 지역이 아니라 열대 지역에서 탄생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들은 페루의 높은 산비탈에서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의 밀림과 습지에서 탄생했다.

북아메리카에는 길들일만한 동물들이 없었다. 북아메리카에는 양도 염소도 젖소도 없었다 가축으로 키울 만한 동물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대규모 평원에는 수백만 마리의 들소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그 까다로운 성미의 동물들은 길들일 수가 없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들소를 벼랑으로 몰고 가 밑으로 떨어트린 뒤 한꺼번에 달려들어 죽이거나 소고기를 취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하지만 그것은 목축이 아니라 사냥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말이 없었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차였다. 소도 당나귀도 낙타도 노새도 없었다.

인간의 거주 한계 근처의 최북단 지역에서는 약간의 기온 변화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한계 상황에 내몰렸다 기온이 떨어지자 수확량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먼저 정착한 중장년들이 좋은 농지를 모조리 차지했기 때문에 이제 막 어른으로 성장한 젊은이들은 패거리를 이뤘고 배를 만들었고 이방인들을 약탈하며 먹고 살기 위해 더 넓은 세계로 뛰어들었다

북쪽 출신 노르만인들은 특정한 나무를 숭배했고 한겨울에 그것을 영생의 이교적 상징물로 삼아 장식했다 그 풍습이 가톨릭 세계에 흡수되면서 크리스마스트리가 생겼다. 노르드인들은 사람과 크기와 모습이 비슷하면서도 초인적인 힘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정령들이 있다고 믿었다 바이킹들이 기독교인으로 탈바꿈함에 따라 정령들은 훨씬 더 작아지고 귀여워지고 순진해 졌다 그 정령들의 우두머리는 도덕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섬뜩한 처벌을 경고하는 의미로 난롯가에 걸친 걸린 양말 속에 숯을 집어넣었다. 우두머리 정령은 성탄절에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지만 못 된 아이의 양말에는 숯덩이를 집어넣는 유쾌 하고 뚱뚱한 사내(산타)로 진화했다

루스인들은 아예 슬라브 촌락민들을 사로잡아 남쪽의 구매자들에게 노예로 팔았다. 사람을 팔아넘겨 돈을 챙긴 것이다. 사실 노예를 가리키는 영어단어 슬레이브는 슬라브에서 유래했다 이 같은 유래는 서기 9세기경 이후 이뤄진 그 노예무역의 규모를 보여주는 음울한 증거이다. 어떤 슬라브 인들은 비잔티움 인들에게 팔렸지만 대다수는 이슬람 세계의 상인들에게 넘어갔다. 이슬람 세계로 팔려간 슬라브 인들은 대부분 가정집 하인이나 성적 노리개로 전락했다.

유럽의 장자 상속제에 따르면 귀족이 사망하면 그 귀족의 모든 토지는 장남에게 상속되어야 했다. 따라서 유럽에는 물려받은 토지가 없고 포부를 펼칠 만한 통로를 찾지 못한 귀족 가문의 차남 삼남 사남 같은 잉여 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 신분의 남자들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소망은 토지 소유와 전쟁이었다 일찍이 장남을 제외한 귀족 가문의 아들들은 수많은 전쟁에 가담해 성취감을 느꼈다 그 시절 유럽 문화에서는 전사의 기술적 표본이 배출되었다. 그것은 바로 철 갑옷을 갖춘 기사였다

벤치를 가리키는 이탈리아어는 banque이고 가게 앞에 환전용 긴 의자인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banquers이다. 그들을 은행업자 bankers라 부른다.

알고 보니 돈은 물체가 아니었다. 돈은 정보였다 모든 것은 회계로 수렴했다 그 신기한 비밀을 알아낸 성전기사단은 세계 최초의 국제적 은행 업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나오는 전염병은 발진티푸스였을 것이다.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치세에 비잔티움을 휩쓸어 버린 전염병은 천연두였을 것이다. 말라리아는 로마가 쇠퇴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십자군 운동 기간 기독교 왕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또 다른 쓰임새를 발견했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다른 기독교인에게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유대교 율법에도 유대인 간의 대출을 둘러싼 그 비슷한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었고 유대인도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는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비 기독교인 즉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줄 만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결과 유대인이 대금업을 통해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유대인이 상대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잠재적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군주들은 유대인 대금업자들을 양성함으로써 그런 상황을 교묘히 이용했다. 사실상 영국 왕들은 유대인 대금업자들을 일종의 간접과세 도구로 활용했다. 그런 식의 간접과세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직접 관리할 경우 왕에게 향할 수밖에 없는 불평불만이 소수 집단, 타자성 탓에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 집단, 에게 쏠리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무슬림의 삶을 규정하는 틀인 샤리아는 모든 무슬림 신자들이 단일공동체로 살아 숨 쉬게 하는 본질이었다. 샤리아는 아라비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샤리아는 다른 사람들이 황야를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개척자가 나무에 새기는 표시 같은 것이었다

(내 생각에 중세는 일종의 집단규범 형성기 같다.

이슬람의 샤리아, 유대의 탈무드, 중국의 공자 사상이나 법가 등 제자백가 사상, 기독교 성경 따위가 이때 생기거나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래서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고 집단 사회규범 형성기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소수의 아프리카인이 올메크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을 수 있다. 그리고 폴리네시아인들이 콜럼버스보다 훨씬 먼저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크다 바이킹들은 확실히 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의 승인을 얻고 거기서 다시 그린랜드를 거쳐 캐나다 동부 대서양 연안인 노바스코샤로 건너갔을 것이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와 이후의 항해자들에게 식량 삼아 배에 돼지를 싣고 가게 했다 그렇게 하면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이 신분을 속인 채 탐험대에 합류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돼지는 정말 치명적인 질병 중 하나인 유행성 감기 돼지 독감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기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야생 세계로 달아난 돼지들은 거의 모든 환경에서 살아남아 번식할 수 있었다. 일단 몇 마리의 돼지가 야생으로 돌아가자 번식을 통해 개체 수와 서식 범위가 늘어나면서 병균이 저 멀리 까지 퍼졌다

 

15세기에 시작된 유럽인의 탐험항해는 확실히 장기 십자군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십자군 정신은 아직 남아있었고 탐험의 영웅적 의미를 부여했다 스페인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은 아메리카 대륙 정복을 십자군 운동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교회의 영토를 확장 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은 정복 사업의 영적 고귀함을 믿었다 공유하는 서사를 통해 그 후기 십자군 전사들의 연대감이 굳어졌다. 기독교적 서사뿐 아니라 진보의 서사도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원주민들이 일련의 사건을 겪는 동안 그들의 신관, 가치관, 도덕관 선악관 정의관 등이 흔들렸고 그들이 따르던 온갖 의식 절차와 풍습의 신뢰성이 약화 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정의도 시대를 초월해 보편타당하다기보다는 그저 사회적으로 일시 유행하는 하나의 가변적인 관념체계인 듯하다.

차는 본질적으로 마약이다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차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72090t에서 17904500t으로 19세기 중엽엔 16200t으로 증가했다.

유럽인들이 차를 수입하려고 지출하는 은이 중국을 영원히 살찌울 것으로 보였다.

 

영국은 식민지를 두고 세계 도처에서 벌인 전쟁에서 프랑스를 무찌르느라 엄청난 자금을 지출했다. 돈이 더 필요했지 덜 필요하진 않았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차 관세를 100 프로 올렸고 그 결과 차의 판매가 위축되고 차의 수입이 감소했지만 정부의 세입은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자는 따로 있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운명은 차 판매에 달려 있었다.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네덜란드의 밀수업자들이(영국 왕에게 세금을 내지 않았다) 들여오는 값싼 차 대신에 동인도 회사의 비싼 차를 사도록 강요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차법tea act은 반체제 성향의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을 자극했고 어느 날 밤 익명의 급진 분자들이 항구에 정박한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선박에 몰래 올라타 오늘날의 화폐로 백만 달러쯤 되는 양의 차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후 영국 정부가 징벌적 성격의 법률로 응수하자 저항의 물결이 더 거세졌고 마침내 미국 혁명이 발발했다 그랬다 결과적으로 청 조정의 정책은 미국의 탄생에 기여했다 청 조정의 정책과 미국의 탄생은 사슬로 이렇게 기다랗게 연결된 인과관계가 양쪽 끝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들소를 잡기 위해 여름에만 초원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그러나 유럽 출신의 개척자들이 동쪽에서 몰려오자 원주민들은 차츰 대평원 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올 때 말을 데리고 왔다 그중의 몇 마리가 달아나 야성을 되찾았고 야생마들은 번식을 거쳐 숫자가 늘어났다. 말의 출현으로 북아메리카에는 새로운 형태의 유목 생활이 나타났다. 북아메리카 초원에는 수십만 마리의 야생 들소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말을 타고 들소를 사냥하는 유목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유럽인들의 이주로 원주민들의 역사적 경로는 중단되고 말았다 미국의 개척자들은 원주민들이 생산하는 물건에 관심이 없었다. 개척자들의 목적은 교역이나 정복이 아니라 원주민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었다. 개척자들은 대부분 능력과 독창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일궈 나갈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각자의 고국에서 그들과 그들의 선조들은 직함이나 돈이나 땅과 거리가 먼 부류에 속했다. 그들은 미시시피강 서쪽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두려워하고 미워한 나머지 아예 소탕해 버렸다가 나중에는 원주민들을 고귀한 미개인으로 신화화했고 스포츠팀에 원주민 부족의 이름을 붙였다. 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이 유대인 대학살보다 더 노골적으로 자행될 때도 있었다 그들은 해충퇴치업자들이 바퀴벌레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바라봤다.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인디언 1명을 죽인 사람에게 최대 25달러의 현상금을 지급하기로 해 약속을 지켰다. 그로부터 한 세대 만에 캘리포니아주 원주민의 90%가 사멸했다

1898년 수단의 어느 대규모 무슬림 군대는 옴두르만이라는 곳에서 훨씬 더 작은 규모의 영국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 보복은 참담했다. 마흐디의 5만 대군에게는 창과 구식 총이 있었다. 영국군에게는 맥심 기관총 열두 정이 있었고 맥심 기관총의 분당 발사 수는 500발이었다 짧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영국군의 맥심 기관총에서 약 50만 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 2만 명의 아프리카 전사가 죽었고 수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영국군 전사자는 48명에 불과했다 옴두르만 전투로 의구심이 싹 사라졌다. 서양 세력과 비서양 세력 간의 대립 즉 기계와 기계 시대 이전의 사회적 별자리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간의 대립에는 아예 경쟁이랄 것이 없었다.

이제는 식민지로 삼을 만한 땅이 없자 후발 주자들은 다른 나라의 식민지들을 빼앗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유럽 열강들은 서로의 식민지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1900년 훗날에 벌어질 사태의 징후는 세계 최대의 금광이 발견된 남부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서 포착되었다. 문제의 금광은 세계 최대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다이아몬드 광산 바로 근처에 있었다. 당시 그 지역의 주인은 보어인이었다. 초기 네덜란드 정착민들의 후손인 보어인은 오랫동안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억압했다 영국인들은 그곳에 몇 개의 소규모 식민지를 건설했지만 금이 발견된 지역 전체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영국에 버금가는 기계 시대의 강국인 독일이 영국인보다 보어인의 충돌에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다가올 미래의 불길한 징조였다

일본은 기계 시대의 도래를 지켜봤고 그 중요성을 이해했고 단기적이고 집중적인 산업화 과정을 밟았다. 1904년 일본은 유럽 열강의 일원으로 평가할 만한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고 러시아에 연거푸 패배를 안기며 서양의 관찰자들을 경악게 했다 결정적인 해전에서 일본군은 러시아 군함을 대부분 침몰시켰다

1898년 미국인들은 필리핀에서 스페인 세력을 내쫓았다. 6년 뒤 미국 대통령 테디 루스벨트는 이제부터 미국이 세계 각국을 대할 때 말은 부드럽게 하되 큰 채찍을 들고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구시대적 군주제라는 거추장스러운 부담에서 벗어나 국민 국가의 조밀한 응집력도 띄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현대적인 원칙인 민주적 입헌주의를 기반으로 삼은 세련된 힘이었다. 1860년부터 1865년까지 이어진 남북 전쟁의 주역은 대량생산된 고성능 무기로 싸우는 몇백만 명의 군인들이었다. 이제 미국은 다시 하나의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그 수백만 명과 그들의 무기를 자국의 단일한 무력으로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 국가로 탈바꿈했고 식민지에 목말라 있었다. 독일과 영국 두 나라는 마치 모기를 잡듯이 적들을 무찔렀다.

대다수 제국에는 암살 음모를 통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국민주의적 혁명가들이 있었다.

1914년 국민주의 성향의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왕위 계승자인 중년 남성을 저격해 암살했다. 그게 다였다. 그러자 제국들은 마치 폭죽이 터지는 방처럼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독일이 갑자기 프랑스를 침공하자 영국은 해상 봉쇄로 맞섰고 러시아 기병대가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자 오스만 제국은 갈리폴리 반도로 병력을 이동했다.

흔히 우리는 1918년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과 1939년부터 45년까지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을 거론한다. 그러나 장담컨대 지금부터 천년 뒤 과거를 돌이켜 보는 역사가들은 단 하나의 20세기 세계대전을 논할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전쟁을 시작했으므로 독일이 보상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가 그리고 당분간 독일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낮은 수준에서 통제하기 위해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했다.

 

오스만 제국의 알맹이가 터키라는 국민 국가로 재탄생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서양 열강들은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같은 아라비아 국민국가들의 국경선을 제멋대로 구획해 아라비아 국민주의에 대처했다 영국인들은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레반트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지원했고 유대인 활동가들은 그곳에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희망을 품었다. 한편 동유럽에서는 폴란드 세르비아 헝가리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같은 여러 신생 국민 국가의 윤곽이 드러났다.

러시아에서는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가 역사상 가장 잔혹한 내전 중 하나 -채 십 년이 안 되는 기간에 약 1천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를 벌이며 통제권을 강화했다. 러시아는 이오시프 스탈린이라는 단 한 사람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국가로 바뀌었다. 스탈린은 집권 후 10년 동안 수백만 명을 살해하거나 투옥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여파로 유행성 독감이 퍼지는 바람에 전 세계에서 약 5천만 명이 숨졌다. 독감이 유행한 원인 중 하나로는 전쟁 중의 병력 이동을 지목할 수 있다. 세계화는 대가를 치렀다

독일의 손발을 묶어 두려고 부과한 배상금이 역풍을 불러 왔다

히틀러는 인종주의적 국가주의를 중심으로 나치 당을 창설했다. 한편 지구 반대쪽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성향의 전체주의적 국가주의가 득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후 스페인에서 추악한 내전이 발발했고 몇몇 열강은 어느 한쪽의 편도 들고 최신 무기도 시험할 겸 뛰어들었다 세계 전쟁의 1부를 누가 시작했는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세계 전쟁의 2부는 확실히 독일이 시작했다. 그리고 2부를 열어젖힌 것은 단 하나의 불꽃이 아니라 히틀러가 구현한 나치 세력이라는 전쟁 기계의 무자비한 야심이었다 또다시 미국은 한쪽편을 들었다. 미국은 1942년 유럽으로 수백만 명을 파병했고 일본군에 맞서 싸울 대규모 함대를 아시아로 보냈지만, 불길은 그 후로부터 3년간 더 타올랐다. 미국은 원자폭탄 두발을 일본의 두 도시에 투하해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최악의 대멸종 사태는 약 25천만 년 전에 발생해 지구상의 모든 생물 종 가운데 96 프로가 소멸했다.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이론은 분분하다. 대체로 화산폭발 산성비 지구 온난화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고 하지만 어느 이론에 따르면 문제는 특정 생물 종이 너무 번성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문제의 생물 종은 바로 이산화탄소를 노폐물로 배출하는 심해박테리아였다 그 박테리아는 바다의 산소를 고갈시킬 정도로 많이 번식했고 그 결과 재난을 부채질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또 다른 대멸종은 지금으로부터 약 6천만 년 전에 발생했다. 아마 소행성이 오늘날의 멕시코 근처에서 지구와 부딪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충돌로 대기가 먼지로 가득해져 햇빛이 차단 되는 바람에 많은 식물이 죽었고 그 식물을 먹고 살던 동물도 죽었고 그 동물을 잡아먹고 살던 포식자들도 죽었다 공룡처럼 덩치가 큰 동물들이 먼저 사라졌고 덕분에 다람쥐보다 크지 않은 조그만 여우원숭이를 닮은 동물을 비롯한 작은 덩치의 짐승들이 번성했고 그 짐승들에서 여러 종의 생물 종이 파생된 끝에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영장류가 나타났다. 19세기에는 화석 연료 연소 위주의 산업과 제품으로 인해 다양한 종류의 오염물질이 대기 중에 배출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일부 오염물질은 온실가스로 알려졌다 이산화탄소 메탄 탄화수소 같은 온실가스는 25천만 년 전의 대멸종과 관계 있는 것과 같은 몇 가지 영향(기온 상승 극지방의 빙산 용해 대양의 산성도 증가)을 미친다.

큰 그림은 우리 마음속에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면 그 그림은 진짜처럼 느껴진다. 사실상 그것은 진짜다. 일단 큰 그림이 만들어지면 점이 여기저기서 사라질 수 있다. 괜찮다. 그림은 그대로 있다.

내 생각에 인생이란 서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학습을 통해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가슴의 크기를 키워나갈 수밖에 없다.

본질적으로 개인보다는 다수가 더 많은 오류를 낳는다. 집단적 무지의 횡포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마녀사냥이나 나치즘 따위가 그렇다. 현재의 민주주의도 어쩌면 아주 많이 잘못된 집단의 횡포를 낳는 산실인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삶, 자유가 중요하다. 그걸 위해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몰락했다. 왜 몰락했을까 공산당 서사가 물질적 현실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체제의 주민들은 소비재 부족 단조로운 생활 공간 비대한 관료제 야만적인 경찰권 따위를 겪고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의 본질을 크게 벗어났기 때문에 붕괴했다고 본다.

특정 시기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마침내 찾아온 영속적 현실 같은 느낌을 풍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재는 그 권위를 누릴 자격이 없다 항상 사라질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감히 영속적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역사를 숙고하고 과거에 주목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쨌든 현재는 미래에 존재할 과거일 뿐이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이가 똑같아 지는 것도 저들을 교화해 우리와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우리가 저들과 똑같아져 저들의 세계에 합류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지도로 세계 곳곳에서 각자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모든 논의가 타당성을 띨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모든 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문화적 경계를 초월하는 관계를 맺으면 맥락을 중요시해야 한다.

모두를 아우르는 미래의 우리 인간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 같은 세계가 생겨나려면 누군가 그것을 상상해야 한다. 또 더 많은 사람이 그것을 상상해야 한다. 또 많은 사람이 그런 세계가 진짜 있다고 믿어야 한다. 또 우리가 마치 지금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듯이 행동해야 한다. 또 그 믿음이 지속하는 한 그 세계는 진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