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자전거 여행(김훈)

by 굼벵이(조용욱) 2020. 8. 14.
728x90

그의 글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시처럼 함축적인 의미들로 압축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디 읽어도 좋으니 천천히 음미하는 게 좋다.

그 안에서 새로운 맛을 발견하는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의 맛깔난 표현들을 살펴보자.

********************

​동백은 한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추잡스러운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매화는 나무가 몸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뿜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 핀 매화 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 있다.

그래서 매화의 구름은 혼곤하고 몽롱하다.

이것은 신기루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 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산수유는 어른 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꽃은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억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오리를 추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꽃은 사람을 쳐다보지 않고 봄빛 부서지는 바다를 쳐다본다.

​나고 또 죽는 시간의 가루들이 수 억 만개의 물비늘로 반짝이며 명멸을 거듭했다.

​젊은 여성의 몸은 꽃 피는 봄 산의 관능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시 한 줄을 써 놓고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왔다. 

'꽃 피워 봄 마음이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이것은 대책이 없는 생의 충동이다.

그 충동은 위태롭고 무질서하다.

​풀 싹이 무슨 힘으로 흙덩이를 밀쳐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물리 현상이 아니라 생명 현상이고 역학이 아니라 리듬이다.

풀 싹들은 헐거워진 흙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흑이 비켜 준 자리를 따라서 풀은 올라온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된장의 친화력은 크고도 깊다.

된장의 친화력은 이중적이다.

된장은 국속의 다른 재료들과 잘 사귀고 그 사귐의 결과로 인간의 안쪽으로 스민다.

이 친화의 기능은 비논리적이어서 분석되지 않는다.

된장과 인간은 치정 관계있다.

냉이 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 관계이다.

이 삼각은 어느 한쪽이 다른 두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

냄비 속에서 끓여지는 동안 냉이는 된장의 흡인력의 자장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또 거기에 저항했던 모양이다.

냉이의 저항 흔적은 냉이 속에 깊이 숨어 있던 봄의 흙냄새 황토 속으로 스미는 햇빛의 냄새 싹터오르는 풋것의 비린내를 된장 국물 속으로 모두 풀어 내놓는 평화를 이루고 있다.

된장은 냉이의 비밀을 국물 속으로 끌어내면서 냉이를 냉이로서 온전하게 남겨 둔다.

​달래는 시련의 엑기스만을 모아서 독하고 뾰족한 창 끝을 만들어 낸다.

​쑥이 국물에게 바친 내용물은 거의 전부가 냄새이다.

그 국물은 쓰고 또 아리다.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아린 냄새가 된장의 비 논리성 속에 퍼져 있다.

그 냄새는 향기가 아니라 고통이나 비애에 가깝다.

​충효가 인간에게 무의미하듯이 글과 칼도 다 필요 없는 것이다.

​가장 늙은 숲이 가장 새로운 숲이다.

숲의 힘은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살려 내는 것이어서 숲 속에서 시간은 낡지 않고 시간은 병들지 않는다.

​종의 기원에 따르면 철새의 발바닥에 붙은 씨앗 한 개가 대륙을 건너가 새로운 숲을 이루기도 한다.

​수목 생리학에 따르면 이 물은 분자들 간의 상호 응집 작용으로 이동하는 것이어서 나무는 물을 위로 올리기 위하여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물은 저절로 이동한다.

나무는 생명이 아닌 것을 생명으로 바꾸는 전환의 과정으로 저 자신의 생명을 완성한다.

그래서 나무는 오래오래 땅 위에 살아 있는 것인데 500년 된 느티나무 조차도 젊어 있어서 땅 위에 늙은 나무란 없다.

​나무는 개체 안에 세대를 축적한다.

지나간 세대는 동심원의 안쪽으로 모이고 젊은 세대가 몸의 바깥쪽을 둘러싼다.

나무껍질 바로 밑이 가장 활발히 살아 있는 세대이다.

이 젊은 세대가 뿌리의 물을 우듬지까지 끌어올려 모든 잎들을 빛나게 하고 나무의 몸통을 키운다.

그리고 이 젊은 세대는 점차 기능이 둔화되고 마침내 정지되어 동심원의 안쪽으로 숨어들고 나무껍질 밑에는 다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난다.

젊음은 바깥쪽을 둘러싸고 늙음은 안쪽으로 고인다.

식물학자들에 따르면 나무 밑동에서 살아 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이 소멸된 상태라고 한다.

자작나무 껍질은 방수 효과가 커서 썩지 않는다.

신라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이다.

​나무껍질은 나무가 겪어 내는 고난의 무늬다.

껍질은 그 허술하고도 완강한 조직으로 줄기 안쪽의 젊은 세대를 보호한다.

​아시아실잠자리의 암컷과 수컷은 공중에서 교접한다

교접을 위해 비행을 멈출 때 그것들의 날개는 맹렬하게 떨리고 그 날개 위에서 여름의 햇빛이 부서진다.

살아 있는 그 며칠 동안 그것들은 투명한 날개로 빛을 헤집고 날아다니면서 교접한다.

그리고 이내 죽는다.

​조선 영조 연간의 지리학자 신경준은 하나의 근본으로부터 만 갈래로 나누이는 것이 산이요 만 가지의 갈래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물이다 라고 했다.

​산은 수직의 공간을 단절시키고 강은 수평의 공간을 소통시킨다.

물은 시원에서 소멸 사이를 잇대어 가면서 흐른다.

하류의 소멸이 상류의 시원을 이끌어 내서 신생은 소멸 안에 있다.

(나. 인생도 마찬가지로 결국 노년이나 죽음 안에 신생이 있다.)

​정 다산은 강물이 합쳐져서도 큰 흐름을 이루며 미래를 향해 전환하는 이 두물머리 물가에서 태어나 유년과 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멀고도 오랜 유배로부터 다시 물가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고 그 물가에 묻혔다.

역사의 전환을 향해 치열한 모색과 실천의 길로 나아갔던 그가 이 두물머리 전환의 물가에서 태어나고 또 돌아와 묻히는 운명은 그의 생애 속을 흘러가는 거대한 강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나. 나도 그렇게 긴 풍상의 길을 흘러왔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다산이 한평생 간직했던 침묵이다.

치욕은 생애의 중요한 부분이고 침묵은 역사의 일부다.

​강물은 치욕의 시간들을 모두 거느리고 전환을 향해 흘러간다.

(​나. 정다산만 치욕의 역사가 있었을까?

세상 만물은 모두 감내해야 할 치욕의 역사가 있다.

그걸 감내하지 않으면 실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강은 인간의 것이어서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지만 길은 인간의 것임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모든 길은 그 길을 가는 자가 주인인 것이어서 이 강가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과 친인척과 이웃은 흔히 상류와 하류 사이의 물가 길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가장 알기 쉬운 앎이 가장 소중함 앎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는데 이 앎은 쉬운 앎이 아니다.

​바다에서 놀던 광어나 우럭은 수족관 안에 넣으면 몇 시간 안에 다 죽는다.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죽으면 도리없이 냉동해야 한다.

양식장에서 자란 광어나 우럭은 수족관 안에서도 잘 산다.

그 놈들은 사람이 잡아먹을 때까지 며칠이고 그 안에서 살아서 버틴다.

거기가 제 고향이기 때문이다.

광어는 이빨이 있고 도다리는 이빨이 없다.

​오징어의 몸통 가운데 세로로 나 있는 검 붉은 줄이 있는데 이 줄은 오징어가 죽은 지 2 ~3일이 지나면 없어진다.

말린 상태에서 이 줄이 굵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오징어가 좋은 오징어다.

오징어를 고를 때는 면적이 넓은 것을 피해야 한다.

크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냉동 오징어는 육질이 다 풀어져서 널어놓으면 밑으로 늘어나서 면적이 커진다.

​다리 10개가 모두 벌어져 있는 오징어가 좋은 오징어다.

​멸치회도 좋다.

멸치는 양식되지 않는다.

모두 자연산이다.

포구마을 좌판에서 3천 원어치만 사면 셋이서 충분히 먹는다.

비늘을 긁어내고 대가리만 잘라 내면 통째로 먹을 수 있다.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대나무의 죽순이 나와서 50일 안에 다 자라 버린다.

더 이상은 자라지 않고 두꺼워 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삶이 불가능할 때 영광보다도 치욕을 내포하는 삶이 더 소중하다고 남한산성은 가르쳐 준다.

치욕은 삶의 일부라고 남한산성은 가르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