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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2

20020701 테니스와 인생

by 굼벵이(조용욱) 2021.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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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7. 1 : 테니스와 인생

 

주말엔 테니스로 건강을 관리한다.

테니스는 우리회사에서 기본적인 성공의 관문이었다.

많은 부분 테니스장에서 네트워킹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상 말단 직원 시절엔 운동장을 기웃거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비집고 들어갈 코트도 부족한 데에다, 층층시하 높은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고, 함께 쳐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 불편한 진실은 운동장에 나타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 저사람은 승진시험을 포기한 사람이구나.’ 하고 낙인이 찍힌다.

11초가 아까워 치열하게 공부해도 붙을까 말까 한 고시 중의 고시인데 그 시간에 나와서 한가하게 공을 치고 있다면 포기했다고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간부 임용고시에 합격하기 전 내가 합격만 하면 지방 사업소에 가서 꼭 해내고야 말 것이라며 간절히 바랐던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운전면허 취득이고,

다른 하나는 프리 토킹이 가능하도록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고,

마지막은 테니스를 배우는 것이었다.

 

나는 첫 번째 임용고시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시 내 직무는 인사처 보임부 간부 인사담당이었다.

간부 인사담당은 우리회사 모든 간부 오천여명의 승호, 승급, 승진, 이동, 교육훈련, 퇴직을 포함한 모든 인사관리를 담당한다.

당시는 승진 및 이동 등 정기인사가 1년에 두 번씩이나 있었고 전산화가 이루어지기 전이어서 모두 수작업에 의존해야 했다.

승진후보자 서열명부 점수계산도 주산이나 계산기로 하나하나 두드려야 했다.

서열명부도 개인기록을 하나하나 오려 점수순으로 나열한 뒤 풀칠하여 만든 후 복사를 떠서 제본했다.

그래서 지금도 도배나 풀칠, 테이핑 따위에 일가견이 있다.

고과나 경력, 자격증, 상벌, 교육 등 모든 자력사항도 일일이 인사기록 카드를 꺼내어 낱낱이 대조 확인하는 절차를 여러 번 거친다.

한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한사람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에 무척 까다롭게 신속성과 정확성을 요구한다.

덕분에 나는 덜렁거리는 성격이 매우 꼼꼼한 성격으로 바뀌어버렸다.

관리대상이 오천여명이나 되다 보니 일요일도 없이 거의 매일 12시 넘어까지 코피 흘리며 일해야 했다.

한 차례 승진과 이동 인사가 끝나고 나면 겨우 하루 이틀 정도 소주라도 한 잔 할 수 있는 짬이 주어지지만 곧바로 6개월 뒤에 있을 승진 및 이동 자료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아침에 출근하면 책상 위엔 언제나 서리가 앉은 듯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었다.

코를 풀면 먼지가 새까맣게 묻어 나왔다.

두꺼운 종이로 된 기록카드를 매일 수십, 수백장 까뒤집으며 기록하고 확인하여 근무 기간이나 점수를 계산해내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폐병 따위가 유행하던 시절이라면 영락없이 병을 얻고도 남을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간부 임용고시를 치러야 하니 가뜩이나 어려운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사수에게 보험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이전까지 간부담당에게 내려온 묵시적 전통이었다.

내 조수가 그렇게 해줄 것을 기대하며, 3개월간 내 사수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모두 도맡아 하고 사수는 오로지 시험공부에만 전념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2년에 걸쳐 매년 한 명씩 차질없이 간부로 배출시켰다.

덕분에 분골쇄신 힘들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걸 감내하며 내가 오로지 바랐던 것은 내가 시험 공부할 때 후임자가 똑같이 나를 도와주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지방사업소에서 인사 경험이 없는 신출내기가 내 조수로 배치되었고 그 바닥 생리를 전혀 모르는 데에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해왔는지도 모를뿐더러 업무를 제대로 모르다 보니 내가 도움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시간 들여 가르치고 도와줘야 할 판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많은 일거리 앞에서 늘 입에 배째라를 달고 다니며 불만을 표시했고 종종 나와 대립각을 보이기도 했다.

그 많은 일거리를 소화하고 소처럼 버텨내는 내가 미웠던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지방 사업소에서 한가하게 보내다가 머리가 터지고 몸이 산산조각 날만큼의 업무로드가 갑자기 주어지고, 노동법은 우리와 거리가 멀어 주말까지 야근에 야근을 거듭하다 보니 그 상황에 접하면 누구든 그와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결국은 내가 미련 곰탱이였던 거다.

다른 사람들은 6시 정시에 퇴근해 시험공부를 하는데 나는 거의 매일을 새벽 한 두시에 퇴근해 공부하느라 신경이 곤두선 데에다 이런 상황에 부닥뜨리다 보니 새벽에 퇴근해서도 이를 빠드득 빠드득 갈며 한 시간 이상은 책상에 앉아 공부에 몰입했었다.

정말 독하게 공부했다.

애초 학창시절에 그런 정신으로 행정고시 준비에 임했어야 했다.

그러나 절대 시간이 부족했기에 나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에는 부장과 담판을 지었다.

다른 직무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했다.

나의 4년여에 걸친 길고 긴 고난사를 잘 알고 있는 그가 다행히 내 청을 들어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합격할 수 있었다.

물론 바쁠 때는 중간중간에 간부담당 업무에 투입되어 함께 도와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전년에 비해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시험을 치른 다음 날 나는 대형서점에 들러 책을 몇 권 샀다.

축산백과와 닭, 꿩 기르기 등에 관한 책이었다.

만일 이번 시험에 떨어진다면 난 미련 없이 간부 임용고시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평직원으로 살면서 다른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는 인간 개개인에 대한 인사기록부가 있어 내 삶의 모든 사항이 거기 명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내가 갈 길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40등으로 합격했고 그 해에 39등까지 간부로 승진발령이 나는 바람에 다시 그 지겨운 간부담당 직무로 되돌아가 1년간 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툭하면 모든 부서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부서원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토해내는 데에다 아랫사람에 대한 의심이 지나치신 분 밑에서 의심까지 받아가며 마지막엔 쫓겨나듯 고향사업소 초급간부로 승진 임용되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 아픈 역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때 MYI 부사장이 파격적으로 내가 수도권인 고향에 근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거다.

그런 분이 먼저 세상을 하직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세상은 그렇게 조급하게 살 일이 아닌 듯하다.

 

그렇게 해방된 내가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이 운전면허증이었다.

마침 친구가 운전학원을 운영하고 있어 그곳을 들락거리며 1종보통 면허를 취득했다.

이후 지금껏 운전하며 살아가니 첫 번째 목표는 달성된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영어였는데 오산A/B에서 미군 상사 한 사람을 섭외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업무종료 후 우리 사업소 회의실에서 그에게 특별훈련을 받았다.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단어와 숙어들로 구성된 미국 책을 그가 직접 미군부대에서 구입해 나누어주고 그걸 교재로 쓰면서 공부했다.

하지만 우리는 본 수업보다 방과 후 수업을 즐겼고 그 추억이 더욱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수업이 끝나면 회사 앞 치킨집에 가서 생맥주를 마시며 맨정신엔 잘 하지 못하는 생활영어를 술김에 히히덕 거리며 솰라솰라 했다.

그게 그렇게 맛나고 재미있었다.

통닭집에 가면 미군 선생은 통닭이 나오기 전엔 절대 맥주를 안 마셨다.

통닭이 나와도 통닭만 먹지 맥주를 안 마신다.

통닭으로 어느 정도 배가 채워지면 그때서야 맥주를 마시는데 그때부터는 맥주만 마시지 통닭을 먹지 않는다.

식사를 먼저 한 후, 술은 안주 없이 술만 먹는 거다.

그 이유를 내가 물었을 때 그는 그게 그들의 문화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만일 안주만 먹으면 안주발만 세운다고 심한 눈총을 받는다.

반드시 술 한 잔 하고 안주 한 첨 먹으며 술이 다할 때까지 안주를 아껴먹는 습성이 있는 반면 그들은 우리와 달랐다.

두 번째 목표도 거기에서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미국 사람 만나도 거리낌 없이 접근할 수 있는 배짱이 생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당시로서는 동년배 중 최상 등급의 어학 성적을 받아 3개월간의 캐나다 연수를 포함해 해외 출장이나, 벤치마킹, 교육, 세미나를 여러 차례 다녀 올 수 있었다.

지금도 집사람은 나 혼자만 해외로 쏘다니며 즐겼다고 투정한다.

 

세 번째 목표인 테니스는 평택 생활 2년차에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평택체육사 사장님으로부터 한 달 간 레슨을 받았다.

아침 새벽에 15분 정도를 포핸드만 집중적으로 연습하게 했다.

백핸드는 그냥 왼손으로 포핸드 방식으로 치라고 했다.

내가 왼손잡이임을 간파한 코치가 그냥 왼손 포핸드를 치게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양손잡이 선수가 되었다.

그게 나의 테니스 인생에 유일한 레슨경력이다.

코치에게 정식으로 배운 것이라고는 한 달 간의 포핸드 연습 뿐이었다.

스매시는커녕 발리도 못 배운 상황에서 6개월간 매일 아침에 나와 죽어라 연습하며 실력이 비슷한 친구들과 게임에 매달렸다.

그랬더니 얼굴 볼살이 쏙 들어가 쪼글쪼글해지고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다.

잘은 못하지만 무엇이든 한번 시작하면 될 때까지 끝까지 달라붙는 고집과 성실성이 실은 내 삶의 원동력이다.

그렇게 기본기를 익힌 상태에서 내 고향 평택사업소 생활 27개월 만에 다시 본사 인사정책부서로 전입했다.

이후 본사 테니스모임에 나가 볼보이부터 시작해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모임에 나가고 있다.

소박하지만 그 때 설정한 작은 목표들이 지금까지 회사생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건강을 포함해 내 삶에 많은 풍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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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잠실 테니스장에 갔다.

오늘 아침 7시까지 나오기로 전날 저녁 KNS와 약속했기 때문이다.

조금 늦은 시간인 720분 쯤 도착했는데 그는 아직 안 나왔고 KHM만 나와서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KHM과 함께 난타로 몸을 풀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KNS가 도착했다.

그래도 한 사람이 부족하기에 KDS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와이프가 자다 깬 졸린 목소리로 그를 바꾸어 주었다.

넷이 재미있게 두어 게임 즐기다 보니 HSH 선배가 도착했다.

그는 내가 서비스를 하는 모습을 보고 풋폴트를 지적했다.

풋볼트를 하면 상대방이 경기의 리듬이 깨져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없게 되기에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거기에 한마디 덧붙이기를

테니스 할 때 풋폴트 하는 놈들이 꼭 골프 칠 때 손으로 치기 좋은 위치에 공을 올려놓고 친다.’는 것이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평생을 그렇게 비열하게 산다는 중요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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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H, 그는 내가 보임부 직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급여부장을 했었다.

그 시절에도 그는 항상 남을 의식하지 않은 채 대화나 전화를 하면서 거리낌 없이 사무실이 떠나가라 껄껄껄 큰소리로 웃어댔었다.

그는 당시 우리회사의 테니스계를 주름잡았었다.

골프도 아마 그랬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어쨌거나 운동신경이 대단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성공에 많은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는 결재를 받으러 상사 방에 갔을 때에도 결재받을 내용에 대한 설명은 늘 뒷전이었다.

의자에 앉아 골프 이야기부터 먼저 시작하고 큰 소리로 껄껄거리며 2~30분간 주제와 상관없는 주변 이야기로 변죽을 울리다가 나가려고 일어서 마지막 문을 향해 나서면서

아참, 이거 결재 좀 해주세요.’하면서 결재파일을 들이민다고 한다.

그러면 상사는 꼼짝없이 내용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채 결재를 한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정년퇴직한 지가 꽤 오래 지난 지금도 그는 테니스를 치면서 상대나 파트너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함께 치는 파트너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예의 그 큰 목소리로 상대방을 즉석에서 지적한다.

남의 눈치 안 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니 정신 건강은 최고일 테고 매일 조깅과 테니스, 골프 등으로 다져진 몸도 그의 장수를 보장할 듯하다.

어떤 경로를 통하여 재취업했는지 모르지만 정년퇴임 후 그는 K신문이라는 신문사에서 자유분방하게 골프 칼럼을 쓰며 노년을 즐기고 있다.

그런 그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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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게임에서 이기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공격과 수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으로부터 넘어온 공에 대하여 방어를 할 것인지 공격으로 전환할 것인지를 순식간에 결정하고 행동을 취하여야 한다.

상대방이 강하고 빠르게 공격해 올 때는 무리하게 맞받아 치기 보다는 수비자세로 전환하여 상대방이 제2의 공격을 할 수 없는 방향으로 공을 슬쩍 돌려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공격의 템포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내가 공격하기 좋은 코스로 공이 넘어오면 가차 없이 허를 찌르는 일격을 가하여 끝을 내야 한다.

공격할 때 공격하지 못하고 수비할 때 수비하지 못하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언제 내 인생의 승부수를 던질 것인지 기회포착을 잘해야 하겠지만 만일 기회가 포착되었다면 끈질긴 승부 근성으로 한 방에 끝장을 보아야 한다.

한 방에 끝장내지 못한 채 기회가 사라지면 그 게임은 지고 만다.

이는 하루하루, 그리고 시시각각의 상황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방어와 공격의 시기를 알고 흐트러짐 없이 이에 대응하는 것이 인생을 사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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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에서 이기는 또 하나의 비법이 있다면 바로 모든 경기에 침착하게 임하라는 것이다.

게임의 흐름을 따라 경기를 하다 보면 급박한 상황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행동이 급해져 무리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 결국 공을 라인 아웃시키고 마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인생살이도 똑같다.

주위 분위기나 상황에 휘말려 경솔하게 행동하다 보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런 때일수록 침착하게 행동하면 언제나 승리한다.

지난 1990년 내가 간부임용고시를 치던 날 시험이 끝난 후 나는 합격을 확신했었다.

왜냐하면 시험 시간 내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문제를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시험에서는 정신을 집중하고 침착하게 하나하나 꼼꼼하게 짚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나중에 그 시험의 결과를 알아본 결과 전 과목이 상위 5% 이내에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등수가 40등에 그친 것은 경력점수가 꼴찌였기 때문이다.

 

늘 그렇게 살자!

공격과 수비의 시기를 알아 이에 맞게 대응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여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