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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2

20020815 내 친구 OOO

by 굼벵이(조용욱) 2021.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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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8.15 : 각별한 친구사랑

 

아침부터 무척 바빴다.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설명회 관련해 공문을 기안하고 결재를 받아 전 사업소에 내려 보냈다.

OOO사에서 가져온 비디오 홍보물을 홍보실에 가져가 방송 편집하여 금주 금요일에 방영해 줄 것을 부탁했다.

홍보부장은 이 제도에 대하여 상당한 흥미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담당 업무를 수행하는 방송실 직원도 자기 자신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며 자기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지를 농담 삼아 물어보았다.

모두들 구조개편에 대한 불안이 몸속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증거다.

10시 반부터 또 사업부제 관련 회의를 한다고 야단이다.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 사람을 귀찮게 한다.

 

친구 JSS가 사업상 어려움을 호소하며 사업자금 지원을 요청해 왔다.

500만원을 지원해 주기로 약속하고 은행마다 돌아다니며 자투리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하였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도 있고 이런 일로 몇 번 돈을 떼이기도 해서 많은 돈을 지원할 수는 없어 500만원 만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나의 생각에 아내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친구를 각별히 좋아하고 사랑하는 내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무역센터 내에 있는 은행들은 무척이나 붐볐다.

돈 찾는데 30분 이상씩 걸렸다.

무역센터 내 은행들이 너무 붐비기에 기다리다가 다시 나와 감정원에 있는 지점을 이용하였다.

오후 3시부터는 또 팀제 관련 교육이 있어 두 시간을 또 거기 할애해야 하기에 도저히 오늘 중 송금이 어려울 것 같아 JSS에게 전화해 모레인 16일 날 오전에 부쳐주마했더니 그러라고 했다.

난 진실로 그 친구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JSS.

머리가 비상한 친구다.

초등학교 6년동안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그 때부터 얼마나 깐족댔는지 5학년 담임인 CSN 선생님이 뺀질이란 별명을 지어주었을 정도다.

우린 6년 내내 정겹게 늘 붙어다녔다.

다른 사람에겐 어떨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게 깐족거림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 정겹게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놀았던 불알친구다.

그 땐 먹거리가 별로 없었기에 밭뚝에 나란히 늘어서 점점이 주홍색 열매로 가을을 가득 메운 감들은 우리에겐 최고의 간식이었다.

벌레를 먹었거나 성질 급한 녀석들이 다른 감들에 앞서 먼저 홍시가 된다.

나무에 올라 그런 홍시들을 따먹는 맛은 그시절 우리에게 최상의 즐거움을 주었다.

우리 감나무들이었기에 그걸 따먹게 할 수 있는 특권이 내게 있었다.

나는 언제나 친구들을 불러 함께 감나무에 올라 감을 따먹었던 기억이 있다.

가장 자주 우리 감나무에 올랐던 친구 중의 한 사람이 JSS이다.

그는 수원의 OO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OO대 OO과에 입학했다.

쌀장사를 하는 아버지가 힘겹게 부쳐주는 돈으로 쪽방에서 자취하며 공부를 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본분에 충실하며 비교적 성실하게 자란 듯 보이는 나와 달리 그는 이념 속 새로운 세상이 그의 현실을 넘어서 버렸다.

지금의 나를 보면 범생이로 성실하고 반듯하게 성장한 듯하지만 대학시절엔 데모대의 선두에서 마이크 잡고 선동질까지 일삼았던 전력이 있다.

내 이름은 조용욱이다.

늘 조용함을 지양하며 편안히 웃고 살지만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면 !’하는 성질이 다른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다.

나와 달리 그는 부모의 바램이나 희생을 넘어서 운동권을 배회하다 제적을 당했었다.

그길로 정치권에 뛰어들어 약관의 나이에 고향 평택지역에서 야당의 국회의원으로 입후보 했었다가 고배를 마신 경험도 있다.

그 후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식당사업을 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성품이 식당을 운영할 수 있는 자질은 아니라는 걸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여당도 아닌 야당 정치인 출신에 대한 사회적 냉대 또한 그의 사업을 힘들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내 오로지 장사만 바라보며 굽신거리고 정진해야 하는 식당업은 그에겐 아마도 고통 그 자체였을 거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세속과 달리 어린 애들을 상대로 자신의 지식을 팔아먹는 학원사업은 그나마 그의 경제적 바탕을 지탱해 주었던 것 같다.

운동권 출신인 그의 처 또한 학원사업을 함께 한 것이 크게 도움을 준듯하다.

야당이 여당 된 요즈음엔 그의 어깨가 조금 펴진 듯한데 지금껏 받아온 설움을 다 보상받을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 노후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아프지 않고 아름다워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퇴근시간이 넘어서야 사보에 올릴 S전무님 인사말씀을 작성해 보고했다.

저녁 645분에는 참 배나무골 오리집에서 기획본부장과의 대화가 있었다.

기획본부장 역시 사업부제의 핵심적 요소로 인사 분야를 꼽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내겐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맥주 한잔 더하고 가자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으므로 맥주집에 들러 맥주를 한 병씩 마시고 나왔는데 JJK 과장이 한 잔 더하자며 또다시 내 소매를 끌어대었다.

결국 요즘 젊은 아이들이 자주 가는 맥주집에 들렀다.

맥주 6병을 시키면 안주와 기념품 캪모자(The Flair)를 공짜로 준다는 말에 속아 맥주 6병을 더 마셔야 했다.

젊은 애들이 하는 칵테일 쇼는 서툶의 미학이 그런대로 신선감을 주었다.

그녀는 가끔 병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했지만 보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더 즐기는 듯했다.

그녀가 준 모자에는 그 술집 로고(TF)가 들어있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술도 팔면서 기념품으로 광고도 함께했다.

그 때 그 집은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삶은 미지수다.

성공과 실패도 모두 미지수다.

그래서 모두 운명을 논하고 하나님을 찾는다.

절대 교만해선 안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