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1. 8(수)
친구 H가 다음 달이면 뉴욕공관으로 전근한다고 J가 신년회 겸 송별식을 해주자는 제안을 했다.
일단 7시에 J의 사무실에 모여 가락시장에서 회를 먹자고 한다.
그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B가 먼저 와 있었다.
H가 전철을 타고 오는 중이었으므로 사무실을 나서 가락시장 전철역에서 만나 횟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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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시장 귀퉁이에 2층짜리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안에 가락시장에서 떠온 회를 먹을 수 있는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건물 초입부터 생선 썩는 냄새가 퀴퀴하게 난다고 H가 불만을 제기했지만 나는 시장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냄새 같아서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J가 그의 로타리클럽 회원 중의 한 사람인 생선 중매인을 시켜 자연산 농어를 잡아놓았다고 했다.
생선회를 뜨고 남은 뼈는 지리를 만들어 저녁을 먹었다.
음식 맛이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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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식사를 마친 뒤 J가 간단히 맥주 한잔 더하자고 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방이역 주변에 있는 ‘아미에’ 라는 단란주점이었는데 그는 주점에 들어서면서부터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호기를 부렸다.
서빙하는 여자들도 4명이나 불러들였다.
무척이나 자주 다닌 단골 손님인 것처럼 행동하며 제일 예쁜 아가씨는 제 옆에 앉혔다.
내가 보니 술이고 안주고 계속 들여보내는데 그는 전혀 통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두 맛이 간 듯하다.
B는 괴성을 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그의 가슴속에 무언가 한이 맺혀있는 것 같았고 그것을 풀어내기 위해서였는지 여느 때와 다른 심한 광란이 이어졌다.
심지어는 자기 바지를 벗어 하반신 나체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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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대한민국 외교관으로 성공한 H는 내게
“너는 끝까지 내 도움을 안 받으려고 하더구나.” 라고 했다.
나는
“혼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아야지” 하면서 받아넘겼다.
H이 가슴 한구석에는 나에 대한 콤플렉스가 남아있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걸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심한 경쟁의식을 느끼며 와신상담하던 때를 기억에서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지금의 자기와 나를 비교하고 관조하면서 나름 역전된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내가 그에게 준 상처를 치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상처를 완전하게 치료해 주기 위해서 그에게 이런저런 부탁도 하면서 더욱 굴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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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말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키가 유난히 작고 표정도 어두웠었다.
나는 당시 어린이회장을 하고 있었고 성적도 많이 앞섰었다.
5학년 이후 그와 같은 반이 아니어서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아 내 기억에 그는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그를 5년여가 지난 고등학교시절(아마도 고2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에 A고등학교에서 만났다.
그는 나보다 훨씬 키가 커졌고 인물도 훤칠해져 있었다.
나는 반가움에 아무런 생각 없이 부러움의 표시로 그에게
“미꾸라지 용됐네” 했더니 그는
“이런 시원찮은 자식!” 하며 얼굴색을 붉혀가며 내게 심한 욕설을 했다.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은 듯했다.
나는 어쩌다가 표현을 잘못했을 뿐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기에 변명하며 따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철모르는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에게 상처를 준거다.
지금 그는 그걸 잊었다고 하지만 늘 기억하며 와신상담했을 것이고 지금도 앙금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성공의 이면엔 나의 철부지 행동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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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가 먼저 가고 B와 J는 계속 노래를 부르겠다고 고집스레 버텼다.
나는 몸도 피곤하여 먼저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B는 연봉 8500만원 벌고 3억 5천을 날렸다고 했다.
이제는 달랑 집 한 채 남았다며 연봉 5천에 10년 보장받을 수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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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도 덩달아서 자기도 적자네, 2억 3천밖에 못 버네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는 제가 가자고 충동질하고는 술값을 안 내려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엔 계산대로 향했고 한도가 60만원 밖에 남지 않은 카드를 가지고 120만원을 계산하라고 큰소리를 치며 마담과 실랑이를 벌였다.
술값이 120만원에 이르자 혼자 내기에는 부담이 갔었는지 나나 B가 보태주기를 바라며 술 취한 척 실랑이를 벌인 듯하다.
급기야 마담과 여종업원은 맨정신인 나를 물고 들어가 나머지 60만원을 내게 했다.
그냥 정직하게 사정을 설명하며 같이 내자고 하면 내가 안 들어 주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술집 주인과 짜고 벌이는 행각 같아서 기분이 몹시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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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와 B를 먼저 보내고 J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가려 했는데 그는 또 맥주 한 잔 더해야 한다며 다시 술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속도 상하고 해서 몇 번 귀가를 권유하다가 모르는 척 그냥 택시를 타고 와버렸다.
속상해 잠도 잘 오지 않았으므로 본전을 찾는다며 사력을 다해 마누라랑 사랑을 나누고 잠을 청했다.
기분이 상해 그런지 중간중간 잠이 깨었고 아침에는 코피까지 터졌다.
(젊은 날 컴뮤니케이션 스킬이 부족했던 우리들이기에 간혹 잘못된 호기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은 듯하다.
나이 들어 회고하건대 인생은 정직하게 사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인간만 서로를 속이며 살아가다 종국엔 봉변을 당하고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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