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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4

20040515 마음이 돌아서는 이유

by 굼벵이(조용욱) 202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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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15(토)

처장이 엊저녁 마신 술로 맛이 간 채 오전 내내 헤매고 있다.

정리해고에 관한 보고서를 전무님들에게 처장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설명하기로 하고 재석표시등을 바라보니 OO본부장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서류를 들고 OO본부장 방을 찾아 본부장에게 보고를 드렸다.

본부장은 매우 겸손한 자세로 내 브리핑을 받으셨다.

오늘따라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무척 버벅 거렸다.

내가 보고를 하는 동안 무대뽀 M처장이 들어와서는 내 보고가 끝날 때까지 앉아 보고내용을 엿들었다.

상대방을 존중해 남이 보고를 하는 동안에는 가급적 들어오지 않는 것이 예의인데 그는 내가 보고하는 중에도 막무가내로 들어와버린 것이다.

그는 몇년 전 나와 함께 미국 출장을 다녀왔었다.

미국 발전소 인력운영 실태를 조사하는 프로젝트였는데 그걸 용역업체에 맡기면 수천만원이 소요된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미국 현장으로 나가 실태조사를 시행하기로 하고 미국과 캐나다의 원자력발전소, 수화력발전소를 용량별로 샘플링해 Operation과 Maintenance 전반에 걸친 조직과 인력운영 실태를 조사했다.

그는 조직부장 자격으로 나는 인사제도과장 자격으로 발전처와 원자력발전처 담당자들과 함께 갔다.

밤새 잠 못자고 실태조사에 필요한 질의내용 따위를 정리하여 현지인들과 만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료들을 요청했다.

덕분에 엄청 고생했다.

그는 나와 한방을 쓰면서 내가 그의 수석 비서 노릇을 해 주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 하다못해 담배도 혼자 살 수 없는 상황이라 수족처럼 붙어다니며 전문 통역원 겸 비서로 최선을 다해 그의 수발을 들어주었다.

밍숭맹숭 그냥 돌아올 수 없어 한국에 돌아오기 전날 브로드웨이에서 '미스 사이공' 공연이라도 보고 가자고 했더니 모두들 흔쾌히 동의했다.

특석이 75불 정도 했었는데 입의 혀처럼 수발드는 내가 고맙고 귀엽다며 그가 내 티켓 비를 대신 내주었었다.

내 평생에 생전 처음 브로드웨이 쇼를 보았고 무대에 헬리콥터가 날아드는 장면을 보고 입이 벌어진 채 닫히질 않았었다.

이후 그는 나의 왕팬이 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자랑해 주었었다.

정부기관 사람들은 물론 주변사람들에게 일도 똑부러지게 잘하지만 영어를 엄청 잘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렇게  나를 아끼던 사람이었고 그런 그를 나도 좋아했었다.

그런데 그도 우리 처장과 각을 세우면서 우리 처 수석참모 역할을 하는 내가 조금씩 미워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M처장을 볼 때마다 눈을 마주칠 수도 없을만큼 어렵다.

우리 처장과의 전쟁 중에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 조금씩 멀어지기도 했지만 저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나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때로는 무례함과 오만방자함 더 나아가 지나친 우월의식이 돋보이는 듯해 불편했고 선무당 사람 잡기식 권력남용의 모습도 보여 조금씩 그가 마음에서 멀어져갔다.

물론 그 이면에는 A라는 괴물이 중간에서 잘못된 정보로 이간질을 해 대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다행히 OO본부장이 내 이야기를 잘 알아들었으므로 더 이상 긴 설명이 불필요하여 얼른 OO본부장 방을 나왔다.

다른 전무님들 방을 기웃거렸으나 모두들 출근을 하지 않은 것 같아 포기하였다.

처장이 녹경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한다.

어제 술을 마신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OOO실 실장과 일명 OO라 불리는 OOO실 여직원 그리고 K부장과 L과장에 H과장이 자리를 함께했던 듯하다.

차수를 바꾸어 오뎅집 여주인과 어울려 거나하게 술을 걸친 모양인데 또 웃지 못할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낸 것 같다.

점심을 먹으면서 전날을 회상하며 서로 낄낄거린다.

본인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술이 취해 일방적으로 이어지는 그의 길고 긴 잡담과 오만방자함은 나를 바로잡는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천박스런 행동이다.

점심을 잘 얻어먹기는 하였지만 사실 매우 불편한 자리였다.

거기에 갑자기 웬 무교동 낙지집을 가야한다고 설쳐대는 바람에 결국 낙지에 생맥주를 한잔씩 더 마시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거의 돈키호테와 동급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K부장과 테니스장에 나갔다.

난타를 꽤 오랫동안 치다가 L코치가 도와주어 3게임을 즐겼다.

그사이에 레슨을 받던 다른 두 사람이 같이 합류하여 다시 한 게임하여 도합 4게임을 하고 운동을 마쳤다.

 

영화 두편을 보았다.

미믹 2와 stuck on it (붙어야 산다) 상편을 보았다.

어머님이 서울 이모님 댁에 올라와 계신다니 가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망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