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2(일)
지난 금요일엔 전무님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했다.
박인환 차장이 처장님 저녁식사를 걱정하기에 내가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잠시 후 처장님이 전무님께서도 저녁 약속이 없으시니 함께 저녁식사를 하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여쭈어보라신다.
전무님께 내려가
“우리 팀에서 인사처장님과 ‘사대부의 찬’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전무님 특별한 약속 없으시면 저희랑 함께 가시지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어디라고?”
“사대부의 찬이요.”
“거기가 뭐하는 덴가?
한식집인가?”
그 질문에 나는 정확한 답이 떠오르질 않아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건 아니고 보쌈 뭐 그런 거, 고등어구이...” 했더니
“알았네, 한번 보세나”
그 말을 듣고 나오면서 나는 너무 시시한 음식점을 잡아서 전무님이 불편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전무님은 그런 분이 아닌데 왜 그러실까 하고 잠시 의아한 마음도 들었다.
나중에 처장님이 전무님 방에 가셨다가 오셔서는 전무님이 우리와 함께 가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음식점 이름이 “사대부의 찬”이라 너무 거창한데에다 내가 설명을 제대로 정확하게 하지 못해 전무님이 무슨 비싼 한식집이나 일식집으로 생각하셔서 부담을 줄까봐서 주저하며 꺼려하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가는 길에 나는 리더십 골드 이야기를 했다.
존 맥스웰이 60세 인생을 결론지으면서 리더십을 총 정리한 것이기에 지금까지 본 책들 중에서 가장 잘 정리된 것이라고 했더니 영문 본을 하나 구해 달란다.
혹 비용이 발생할지 몰라 그것도 Paper back으로 해달란다.
자신의 편의성을 위해 PB서적을 주문하신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마도 아랫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경제적인 손실을 주기 싫어서일 것이다.
홍어 삼합과 보쌈, 오삼 불고기 그리고 고등어구이와 청국장을 안주와 반찬삼아 술과 밥을 먹었다.
전무님은 그동안 이리저리 들어 알고 있던 재미난 이야기들을 풀어놓으셨다.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웃음꽃을 피웠다.
전무님의 가장 큰 장점은 이것저것 체면 안 가리고 편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바람둥이가 천당 간 이야기와 파리 행 비행기와 Irish 할머니의 유머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도 존 맥스웰의 리더십 골드에서 본 아들 삼형제가 어머니에게 한 선물 이야기를 해 드렸다.
깔깔거리며 마신 술은 신운섭 차장이 추석에 고향에 갔다가 가져온 소곡주 한 병으로 끝냈다.
처장님이나 전무님 모두 국정감사 때문에 술을 피하시는 것 같아 그 정도에서 끝을 냈다.
마침 전무님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기에 전무님은 식사 후 바로 들어가시고 처장님도 한잔 더 하시자고 제안을 했지만 반응이 별로여서 보내드렸다.
차장들이 한 잔 더 생각이 있는 것 같아 당신들끼리 한 잔 더 하라고 하고 나도 일찍 들어왔다.
차장들은 전철 역 앞 럼보트에 가서 병맥주 하나씩을 더 하고 들어갔단다.
집에 들어와 낚시대를 챙기고 잠을 청했는데 12시 반경에 깨고 두시 경에 깨어 더 이상 잠이 오질 않아 온 밤을 하얗게 뒤척였다.
잠깐 졸다가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견지여행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기에 앞서 현암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암은 10분 정도 뒤에 출발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가서 기다리면 되지 싶어 그냥 곧바로 출발했다.
현암을 태우고 여울에 도착한 시간은 채 7시가 되기 전이다.
여명이 어둠의 그림자를 막 몰아내는 시기에 어둑어둑한 강줄기를 바라보며 향교여울 앞에 섰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여울 길을 찾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현암은 계속 잡아내는데 나는 계속 물렸다가 터졌다.
그렇다고 내 챔질이 빠른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오전에 현암이 멍짜 다섯 마리를 끌어내는 동안 나는 대적비 한 마리 밖에 잡아낼 수 없었다.
조금은 시기와 질투가 부른 짜증이 밀려왔다.
현암이 나를 생각해 오후에는 내가 원하는 물골에 서라며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내가 당초에 서려던 10며 미터 밑으로 내려가서 시도했다.
넣자마자 멍짜 한 수가 올라온다.
이어서 한 마리 더 올라온다.
그러고는 끝이다.
가지고 있던 덕이며 묵이를 모두 풀어 물고기들에게 보시하고 낚시를 접었다.
유수와 김우진이 함께 합류했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선수를 빼앗긴 이후 여기 저기 떠돌다가 한 마리도 못하고 결국 다시 돌아와 우리 옆에 서서 한 마리씩 걸어내 겨우 꽝조사를 면했단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최미자 소머리국밥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소문난 국밥집 국밥이 입맛에 맞는다며 현암도 좋아하는 것 같다.
성남에서 길을 잘못 들어 조금 고생을 했지만 어렵지 않게 집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지난 밤 잠을 설치는 바람에 몸이 무척 무거웠다.
깊은 잠에 빠졌고 다음날 아침 테니스장에 가서 세 게임을 하고 사무실에 출근했다.
국정감사 준비라지만 아무런 할 일 없이 하루 온종일 졸거나 영화를 봤다.
아마 대부분의 직원들이 주말에까지 출근해 그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국정감사는 정말 불필요한 소모전이다.
처음으로 마티즈 크리에이티브를 타 보았다.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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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렇게 여울을 찾는지 모르겠다.
그 시간이며 돈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물고기가 그리 많이 잡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강가 야외생활이 좋아서일까?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강가도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벌레도 많다.
요상한 벌레도 많다.
그런데 왜 주말이면 그곳에 가고 싶은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여러 사람 벅적거리는 것도 싫고 그냥 조용히 한 두 사람 어울려 강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들어가 봐야 별것 없고 기껏 물고기 몇 마리 잡아 올렸다가 놓아줄 뿐이다.
왜 그럴까?
야외에 나가면 특히 원초적 본능이 솟아오르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닐까?
원초적 본능이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닐까?
‘6·25전쟁 당시 연합군과 중공군은 전쟁포로를 정치적 선전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각각 심리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미군 포로가 공산주의로 전향한 기록이 있다.
중공군은 미군 포로들에게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글을 짓게 한 뒤, 우수한 글을 쓴 포로에게 담배와 사탕을 상으로 줬다. 작은 보상에 맛을 들인 포로들은 글짓기 대회가 열리면 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자연스럽게 상당수가 자발적 공산주의자로 변했다.
중공군은 포로들이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도록 강제하지 않았다.
그 대신 경제적 불평등이란 소재를 통해 체제를 비판하도록 유도하는 넛지를 사용했다.
조금씩 심리적 저항요소가 제거되자, 일부 연합군 전쟁포로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운 대상인 공산주의로 전향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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