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주어지지 않은 알 수 없는 시간과의 마주침이다.
그리고 죽음이란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운동을 정지한 상태를 말한다.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태어나고 죽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이어간다.
동양은 농경문화가 발달하다보니 농작물의 파종과 수확을 중심으로 순환적 시간관을 가진
반면 서양은 유목 문화가 발달하여 직선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노동은 기본적 의무이다.
다른 동물들은 먹이활동을 할 뿐 노동을 하지는 않는다. 노동한다는 것은 '경작(culture)한다'는 의미이다. 즉 씨를 뿌리고 가꾸어서 수확하는 과정이 노동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이는 노예변증법을 통해서도 증명할 수 있다. 만일 스스로 노동하지 않고 모든 것을 노예에 의존한다면 결국 노예 없이 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즉 노예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은
그래서 왕이든 노예이든 모든 사람은 노동을 기본으로 살아가야 한다.
부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부를 쌓아 공장을 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는 物의 노예가 되어 욕망의 열차를 타고 브레이크 없이
낭떠러지로 달리고 있다.
사물의 본성을 깨우쳐 지혜를 얻고 자유로운 삶을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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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가 2500년 전에 겸애사상으로 예수님과 똑같은 주장을 했다는데....
목공 노동자 출신 계급이면서 공자와 쌍벽을 이룬 사상가로 정치 경제 종교 철학
모두를 아우르는 당대 최고의 구루였던것 같다.
공자는 귀족출신으로 예법을 통해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왕권수호에 일조하고
그의 사상이 종교로까지 승화될 수 있었다.
예수님도 노예신분의 천민츨신이었던걸로 보면 비슷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500년 전의 묵자 사상이 동방박사를 통해 흘러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더군다나 묵자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 출신이란다.
그는 절대 왕정시대에 공화정을 외쳤으니 절대권력의 눈에 나는 것은 당연하다.
역사 속에 권력의 그늘에 가려 꽃피우지 못한 묵자의 사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과 어우러져 다시 부활되었으면 한다.
겸애든 박애든 나보다는 남을 더 배려하려는 생각만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
원래 사람이 무리를(조직) 이루는 이유는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무리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무리의 룰은 철저하게 개인이 배제되는 것이 맞다.
더군다나 무리의 리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 철저하게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2500년 전 우리의 조상 묵자님의 생각대로 이 나라가 계승 발전되어왔다면
우린 얼마나 멋진 나라가 되었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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