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
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 가족에게 있어서 나는 무엇일까?
내일 아침 내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벌레로 변신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도 경제적 주체로서의 내 지위만 있을 뿐 벌레 이상도 이하도 아닌것 아닌가?
나는 내 가족에게 경제적 주체로서의 역할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벌레가 죽은 뒤
아버지든 여동생이든 경제활동에 종사하며 그들만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의 존재가 지금까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정체성 확립을 가로막아 왔던 것은 아닐까?
옆면이 가려진 검은테 안경을 쓰고 살아왔던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보자.
나도 내 가족의 정체성 확립에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크게 공감한다.
내 상사에게, 내 동료에게, 내 부하에게 있어 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는 전우들의 생각을
전쟁이 끝난 후 평화로운 세상에서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화장실 가기 전 생각을 화장실 다녀와서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집사람은 오늘 저녁 슈퍼에서 무얼 살까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철없는 큰애는 기말고사 중이라 시험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더 철없는 작은 애는 어떻게 하면 예쁜 아가씨에게 멋져 보일까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들의 안중에도 없다.
나도 지금 가족이 안중에도 없다.
집사람은 가끔 전화를 해서는 왜 전화도 없냐고 한다.
가족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말일게다.
관심을 갖는다고 내 방식대로 훈계에 나섰다간 또 한번 냉전을 겪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오로지 아이들이 어려움 없이 독립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것에 앞서 우선 정신적 육체적으로 독립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많이 다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집사람을, 집사람은 나를 이미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해 놓고 있다.
즉 과거의 행동패턴으로 서로를 묶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내가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어느날 갑자기 벌레로 변신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 날부터 나는 내 가족에게 경제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부담스런 짐으로 전락할 것이다.
자연은 늘 밀알을 썩혀 새싻을 틔운다.
그들은 아마도 벌서 오래 전에 나를 벌레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 침대 위에 커다란 말똥구리로 변해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내 안에서 신선한 우유가 아닌 썩은 생선조각을 탐닉하는 벌레를 본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시간에 눈 비비며 일어나
내 가족과 내 주변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담아
열심히 절을 하고있는 모습의 내가 계속될 확률이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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