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무조건적 사랑이다.
무조건적 사랑이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에 도덕과 질서를 부여하며 생의 추동인 본성을 심어놓았다.
그리고 만물의 궁극적인 목적을 무조건적 사랑 즉 신에 두었다.
영적 성장이란 결과적으로 무조건적 사랑의 성장을 말한다.
태어나 성장하며 지금까지 받은 것 이상으로 완벽하게 무조건적 사랑을 세상에 되돌려 줄 수 있을 때 영적성장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 완성태가 바로 신인 것이다.
신의 뜻에 따라 세상 만물이 신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죽음을 앞두고 가장 완벽한 사랑을 실천하려 한다.
새끼의 안전한 탄생과 생존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 아니 죽어서 까지 헌신하는 작은 물고기처럼...
인간은 교만해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흙으로 돌아가 미생물의 먹이가 되는 큰 사랑을 실천한다.
죽어서 신이 되기보다는 살아서 깨닫고 일찍이 신의 경지에 오르는 게 인생의 목적이고 신의 뜻이다.
간단한 진리인데도 지금까지의 생각습관으로 인해 쉽게 변하지 않는다.
현재의 나를 만드는데 걸렸던 시간 이상으로 생각과 행동의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내 인생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노력해도 나는 110세가 되어야 겨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이 되지 못하고 불완전한 상태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빨리 깨닫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신은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은총을 내리신다.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 들 중 내 의지 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은 모두 신의 은총이다.
내게 즐거운 일이든 고통스런 일이든 모두 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한 신의 뜻인 것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신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해야 하며 신의 뜻을 은총으로 수용하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정신의학자인 스캇 펙의 책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고 마음속에 느낀 바를 적어보았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비방하시지는 마시길...
내 생각을 만들어 낸 스캇 펙의 글을 발췌하여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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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은 이것을 “노이로제란 항상 마땅히 경험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라고 표현했다.
문제란 그대로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문제는 직면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는 것이며 영원히 정신적인 성장과 발전의 장애가 된다.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그때그때 해결해 나가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
신경증인 사람들은 너무 책임을 지려하고 성격장애인 사람들은 응당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
어떤 의미로 보면 아이들은 모두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다.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당하는 혼란에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나찌즘과 권위주의에 관한 그의 연구에서 이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했다.
책임지는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백만 천만의 사람들이 하루하루 자유로부터 도피를 시도한다.
무기력함은 자유에 대한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서 생겨난다.
건강해 지려면 조만간 성인의 생활 전체가 개인의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는 것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정신치료란 지도를 수정해 가는 과정이다.
진실에 충실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첫째로 계속적이고 끊임없이 엄중한 자기 성찰을 하는 삶이다.
인간 본능의 다른 특징은 비 본능적인 것을 행하고
본능을 초월하여 우리 자신의 본능을 개선하는 능력이다.
하얀 거짓말은 우리가 말하는 그 자체는 거짓이 아니지만 진실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빼버린 말이다.
진실에 충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1. 거짓말 하지 말 것
2. 진실을 숨기지 말 것
3.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진실을 숨기지 말 것(권력 등으로부터의 보호)
4. 진실을 숨기는 결정은 상대방 입장에서 내려야 함
5.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음
6. 그 사람이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진실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함
7. 상대방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세네카는 2000년 전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라고 했다.
에리히 프롬은
‘더욱이 흥미를 돋우어 주는 것은 생을 통해서 인간은 죽기를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 이라고 했다.
고통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더 이상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한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은 고통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래서 고통은 곧 기쁨이라는 역설이 존재한다.
당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 의존하여 기생하는 식객입니다.
거기에는 선택도 자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이기보다는 오히려 필요성 때문이지요.
사랑이란 선택의 자유로운 실행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잘살기 위해 상대방과 함께 살 것을 선택하는 것이죠.
어머니가 비만인 아이에게 음식을 자꾸 먹이는 것. 아버지가 아들에게 방이 가득하도록 장난감을 사주는 것, 옷을 옷장 가득 사주는 것 따위가 잘못된 사랑관념이다. 사랑은 단순히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지각 있게 주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지각 있게 주지 않는 것이다. 지각 있게 칭찬하고 지각 있게 비판하는 것이다.(love is coaching)
참사랑은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실존하는 것이다.
이를 구별하는 열쇠가 바로 의지이다.
나는 사랑에 대해 정의하기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장시키려는 의지’라고 했다.
진정한 사람은 감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의지적인 것이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커진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다시 채우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도우면 도울수록 내 자신의 정신적 성장도 더욱 더 촉진된다. 나는 완전히 이기적인 인간이다.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을 통해 성장함에 따라 내 기쁨도 증가하고 계속해서 증대될 것이다. 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비기:지혜로운 하나님이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할 뿐 아니라 서로 분리 또는 상실의 위험에 직면하면서까지 독립성을 길러주려고 애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정신적인 성장이며 정상으로 올라가는 이 고독한 길을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독립된 개체로 존경해야 한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는 어떤 관계든 서로 정신 치료적 관계이다.
보통사람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삶에 대한 이해(세계관)를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부모의 종교에 반항하고 거부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세계관이 우리가 능력껏 성취할 수 있는 세계관보다 더 좁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이란 기적적인 것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것을 뿌리로 삼아 인간의 지고한 인격과 경험이 자라는 것이다.
모든 물질적인 것은 언젠가는 낡아서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온전하다.
어쨌거나 기적이 어디로부터 오는가에 관계없이 우리의 의식적 의지와는 상관없는 어떤 힘(기적)이 우리의 영적 성숙을 도와준다는 사실은 입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려면 생명 자체의 성장과정이라는 또 다른 기적을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기적을 지금껏 진화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영적인 성숙은 곧 개인의 진화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육체적으로 노쇠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일생동안 계속해서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영적인 능력은 늙어죽을 때까지라도 성장할 수 있다.
로마법에 따르면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 절대권을 가진다. 자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발전적 과업을 가진 특별한 존재이고 사랑으로 돌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15세기가 되어서였다.
그러면 우리 개인과 인류 전체를 추동하여, 우리 자신의 관성이라는 본능적 저항을 이기고 성장하게 하는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이 힘에 대하여 이름을 붙였다. 사랑이라고. 나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나가는 의도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다.
자아의 확대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랑은 바로 진화이다. 그것도 진행 중인 진화이다. 모든 생명체 속에 존재하는 진화의 힘은 인간의 사랑으로 인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애라고 하는 사랑은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산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같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곧 진화의 목적이다. 하느님이 곧 진화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도착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은 알파이고 오메가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우리 모두가 게으른 것이다. 아담과 이브 이래 우리의 모든 조상들이 그랬다. 그러므로 원죄는 존재한다. 그것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실재하는 현실이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있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 하느님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모든 두려움이 다 게으름은 아니지만 두려움 가운데 상당부분이 게으름으로 인한 것이다. 즉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따른 두려움, 현재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심리상담자들은 자신들의 환자가 약간의 변화를 원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라든가 그 변화에 따르는 일은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대다수의 환자들이 열에 아홉 심리치료를 시작하고 미처 끝내지도 못하고 그만둔다. 그 이유가 바로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다 성숙해진 사람은 자신의 게으름을 잘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게으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덜 게으를 수 있다.
우리는 병든 자아와 건강한 자아를 모두 가지고 있다.
1. 악이나 악마는 현실에 존재한다. : 선을 해치는 단체나 사람들이 그 예다.
2. 악은 게으름의 극한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게으름이다. 보통의 게으름이란 그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악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3. 인간의 진화에 있어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악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4. 엔트로피는 사악한 폭력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문제가 되고 인간에게 있는 악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사회적 권력이라는 것이다.
의식 conscious 이라는 말은 함께 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 con과 안다 라는 의미를 가진 scire에서 유래한다. ‘함께 안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은총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는 바로 나 자신의 내부이다. 지금의 자기 자신보다 좀 더 현명해지고 싶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길을 찾아라. 이 말은 곧 하느님과 인간이 마주 보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의식과 무의식이 마주 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무의식이 바로 신이다.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이다. 우리는 언제나 신의 일부이다.
겉으로 드러난 의식이라는 작은 식물에 영양을 공급하는 튼튼한 뿌리가 무의식이다. 집단 무의식이 바로 하느님이다. 개인 무의식은 개인과 하느님이 마주보는 것이다.
의식이야말로 정신 병리의 온상이고 정신이상은 의식의 혼란이다. 우리가 병이 드는 것은 의식이 무의식의 지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의식과 그것을 치료하려는 무의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의식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신질환은 개인의 의식적 의지가 무의식의 신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려고 할 때 일어난다. 나는 영적 성장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는데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의식을 지닌 채로 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의식은 존재 전체 중 실천하는 부분이다.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의식이다.
영적 권력이 지닌 능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도의 깨달음을 지니고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 의식이다. 사람들은 대개의 순간에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면서 어떤 결정을 내린다.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다.
권력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고독이다. 영적으로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은 자기 주변에 자기와 대등한 수준의 이해력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기가 정말 어렵다. 예수의 끝없는 절망은 여기서 나온다.
우리의 의식은 현실을 부정하더라도 무의식은 전지전능하므로 진정한 현실을 파악하고 긴장감을 조성하거나 여러 가지 징후를 내보이는 방법으로 우리의 의식에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인식시키고자 노력한다.
원하지 않아도 증후군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것이 은총의 한 양상임을 말해준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무의식이 전해주는 메시지다.
은총은 획득되는 것이고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을 잘 훈련하여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만들어 감으로써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 생각과 행동에서의 독립심을 요구한다. 예언자들의 말이나 은총이 얼마간 도움이 되겠지만 그 길은 반드시 혼자 가야한다.
은총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하느님이 실재한다는 사실 이외에 하느님의 의지가 인간 개개인의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돕는다는 사실을 가장 명백하게 입증해 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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