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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by 굼벵이(조용욱) 201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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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마크 롤랜즈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그의 '늑대와 철학자'는 밀란 쿤데라의 생각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습니다. 

모든 학문은 맥이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가 맥을 같이 하듯 서양철학도 서로 맥을 이어 생각의 방향이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대부분이 그렇습니다만 

마크 롤랜즈와 밀란 쿤데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변화무쌍한 가벼움에 대해 해부합니다. 

그런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나는 마크 롤랜즈가 나이들어 경륜이 쌓이면 다른 이론을 내 놓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합니다. 

젊었을 때 바라보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생각과 나이들어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정의는 크게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인간을 무겁게 봤는데 요즘 사람들은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무거운건 이상이고 가벼운건 현실인 모양입니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면서 인간 이성이 신을 죽이면서 가벼워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가운데서 존재의 가벼움을 표현하는 언어들을 모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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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자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두려움과 갈망 사이에서 어떤 타협점을 찾아야 했는데 그 타협점을 그는 ‘에로틱한 우정’이라고 불렀다.

그는 애인들에게 이렇게 못 박았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한 독점권을 내세우지 않는 감상이 배제된 관계만이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실수에 의한 아름다움은 미의 역사에서 마지막 단계야.

 

세상에는 폭력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육체적 사랑이란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프란츠는 모든 거짓의 원천이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분리에 있다고 확신했다.

 

사랑은 전투야. 나는 오랫동안 싸울 거야. 끝까지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미래로 도망친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동침하는 줄 몰랐지만 사태의 진상을 알자 자신이 결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질수가 없어 그는 자기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던 것이다.

(무지라는 이유로 면책될 수는 없다)

 

아첨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내 생각에는 한가지 필연이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 직업이었다. 그가 의학을 택한 것은 우연이나 합리적 계산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욕구에 따른 것이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저주와 특권, 행운과 불운, 사람들은 이런 대립이 얼마나 교체가능한지를, 인간 존재에 있어서 양극단 간의 폭이 얼마나 좁은지를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는 없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첫 번째는 익명의 무수한 시선, 달리 말하면 대중의 시선을 추구한다.

두 번째 범주는 다수의 친한 사람들의 시선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속한다. 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칵테일 파티나 만찬의 기회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셋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넷째는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몽상가이다.

 

조충이 인간에게 기생하듯 인류는 소에게 기생하며 산다.

인류는 거머리처럼 소젖에 들러붙어 있다. 인간은 소의 기생충이며 아마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그의 동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렇게 정의할 것이다.

창세기에서 이미 신은 인간에게 동물 위에 군림할 권한을 주었으나 그 권한이란 단지 빌려준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세계는 데카르트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